들뜬 분위기. 그 안에서 동죽은 심드렁하게 얇고 좁은 종이에 소원을 적는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이 존재하기에 동죽이 지금 존재할 수 있었으나 동죽은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칠석날을 기념하는 축제, 혹은 행사와 같은 이것은 신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였다. 그러니까, 대나무의 신인 동죽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소원을 비는 인간들은 다양했다. 아주 어린 인간부터 나이가 많은 인간까지. 거의 가족 단위인 듯한 인간들의 무리에서 동죽은 문득 홀로 서있는 아이 한 명을 눈에 들였다. 백발이라기엔 옅은 회색빛을 띤 짧은 머리칼을 가진 아이는 북적이는 와중에 소원을 적지도, 빌지도 않는 채로 우두커니 자신이 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아이는 소원이 없는 것인가. 인간이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 지금껏 본 적 없는 태도의 아이에 약간의 흥미와 의아함을 가진 동죽은 잠시 그 아이의 눈에만 띄도록 현신해 조용히 앞으로 다가갔다.
"왜 소원을 빌지 않는 것이냐."
인기척 없이 다가온 동죽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잠시 토끼 눈을 뜬 아이는 곧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옅게 웃음을 짓곤 대답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니까요."
"어찌하여 빌어보지도 않고 생각하는 것이지."
"제가 빌고 싶은 것은, 신께서도 이루어주실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신이라는 걸 어찌 확신하느냐."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신과 같은 존재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담담히 말을 이어가는 아이의 소원을 읽어내는 것은 동죽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병마가 얽힌 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붉고 검은빛을 띤 그것은 아이의 몸을 지독히도 휘감고 있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운명, 이런 것은 불행한 운명이라 했다. 신이라 해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동죽은 가만히 아이를 응시하다가 작게 읊조렸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밝을 명, 밝을 영자를 쓴 강명영이라 합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그 말을 끝으로 동죽은 현신을 풀고 나무 위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동죽이 대나무 사이에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대숲을 빤히 바라보던 명영이라는 아이는 사람들이 흩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거처로 걸음을 옮기는 듯 보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죽의 검은 눈동자가 바람에 대숲이 흔들리듯 일렁였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명영은 작년 칠석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대숲에 들러 한참을 머무르곤 했다. 명영이 칠석에 마주쳤던 그 남자는 분명 이 대나무 숲의 신일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차도가 없다고 의원이 몇 번이나 고개를 저었던 명영의 병은 칠석 이후로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분명 소원을 빌지 않았음에도. 오늘도 대숲에 들른 명영은 선선한 바람이 불자 고개를 들어 대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디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하나가 떠가고 있었다.
작년 칠석, 동죽이 존재가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현신을 했던 그날. 동죽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명영의 몸에 잠식해있던 병마를 해치웠다. 신력이 다한 신은 인간과 같이 사망하는 것이었으므로 -시체가 남지 않는다는 점은 달랐지만- 동죽은 다시 병이 나은 명영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현신에 많은 신력이 쓰이는 점도 동죽의 소멸에 큰 한몫을 더했다. 대나무 숲이 크게 흔들리며 울던 날이었다.
칠석은 또 돌아왔다. 사람들의 믿음과 소원이 모여 동죽은 다시금 태어났다. 믿음이 모일 때 탄생하는 것이 신이었으니, 동죽 또한 다시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동죽은 북적이는 인파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다시 태어난 동죽이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작년 칠석 때 만났던 그 아이였다. 그때였다. 동죽이 강한 이끌림을 느낀 것은.
'신(神)과의 재회.'
이끌림에 몸을 옮긴 동죽의 눈에 흰 종이 위에 쓰인 짧은 글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그 아이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명영. 밝고, 또 밝을 아이. 한 발짝, 두 발짝 옮겨 동죽과의 거리를 좁힌 명영이 조심스레 팔을 뻗어 동죽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고마워요."
대답은 따르지 않았으나 답신처럼 불어온 바람이 명영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큰 손이 명영의 머리를 감싸고 작은 몸을 마주 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