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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님 커미션-1

波濤 2019. 9. 2. 14:17



Chapter 1. 미지의 인물 



"국왕께서 승하하셨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나라는 극심히 혼란스러워졌다. 흡혈귀에게 물려 부르짖는 사람들이 만연했고, 길거리엔 검붉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가히 폐허라고 해도 좋을 광경이었다. 까마귀 떼가 울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험가들의 길드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하필이면 길드 제일의 실력자인 불의 전령, 필라르까지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더욱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짙은 갈색에 금색 자수가 수놓아진 로브를 쓴 의문의 인물이 길드에 들어왔다. 그리곤 물었다.


"불의 전령은 어디에 있지?"


당당한 어투였으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가녀렸다. 짙은 갈색 로브 사이로 금발 머리칼이 찰랑이며 빛났다. 비록 필라르에겐 상대도 되지 못하는 조무래기만 모여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길드였고 여자 하나를 제압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모여 있던 자들은 코웃음을 치며 의문의 인물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필라르는 왜 찾는 거지? 그 녀석의 정부라도 되는 건가?"

"그깟 녀석 찾지 말고 우리랑 놀지그래? 재밌게 해줄 수 있다고."

"그 로브 좀 벗어봐. 금발 머리가 아주 예쁜 것 같은데, 얼굴은 얼마나 예쁜지 좀 볼까?"


갖가지 희롱에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는 기색이 없자 금세 여자가 거슬려진 길드원들은 눈빛을 주고받고 여자의 로브를 벗길 셈으로 달려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평생 저지른 실수 중 가장 큰 실수였다.


**


한편, 필라르는 산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하인리 백작의 저택에서 바이올렛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간 받은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기에 도무지 음식을 삼키지 못했고, 그의 눈동자 또한 텅 비어있었다. 의욕 따윈 없이 폐인처럼 창밖만 바라보는 신세였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자조를 하려 해도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기에 무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어찌나 폐인 같았는지, 보다 못한 하인리 백작이 팔짱을 낀 채 낮은 어조로 읊조렸다.


"산책이라도 하고 오거라. 네가 살던 마을에 다녀오면 이 꼴도 좀 나아지겠지. 지금은 도무지 내 저택에 머무는 인간이라 말할 모양도 안 되는구나. 밖엔 흡혈귀들이 판을 치지만 넌 내 피 냄새를 묻히고 있으니 괜찮을 게다. 여차하면, 바이올렛 그 아이를 동행 시켜줄 테니."

"… 됐습니다.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괜한 곳에 바이올렛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필라르는 하인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윽고 산속 깊숙한 저택에서 마을로 나간 필라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절반이 넘게 부서지고 무너져 가는 가게들과 넝마가 뒹구는 길거리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필라르의 눈빛이 다시 검게 가라앉았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마을의 분위기는 당연스럽게도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다 부서져 가는 상점들이 영업을 제대로 하고 있을 리도, 영업이 될 리도 없었고 나름 유명인인 필라르를 보고도 아는 체를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마을에 오면 그나마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을에 오기 전보다 암울해진 기분으로, 필라르는 왔던 길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필라르의 팔을 턱 붙잡은 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검을 빼들려던 필라르는 필라르의 팔을 잡은 자의 의외의 인상에 의아해했다. 실력 있는 용병은커녕 그냥 평범한 필라르 또래의 소녀였기에.


"만났어, 만났어!"


소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필라르의 의아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라 할지라도 아직 방심할 순 없다는 생각에 소녀를 거칠게 떼어낸 필라르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뭐 하는 짓이지?"


그 말을 듣자 소녀의 갈색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긴…, 너는 날 모르겠지."


로브를 걷은 소녀의 금발 머리칼이 보기 좋게 흩어졌다. 누가 봐도 미소녀라 단언할 수 있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정작 필라르는 이 소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의뭉스럽기만 한 금발의 소녀는 환하게 웃으며 필라르를 이끌었다.


"내가 술을 사줄게. 어때? 우리 마시면서 얘기하자."


아는 것 하나 없는 소녀였지만 필라르에게 공격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여 필라르는 잠자코 소녀의 뒤를 따랐다. 술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뒤로 잿빛 먼지가 흩날렸다.



Chapter 2. 일방적인 재회



그나마 아직까지 제대로 된 영업을 하는 가게가 있었는지, 소녀는 그곳으로 필라르를 이끌고 들어갔다. 


"나는 영주의 딸 '시라'라고 해."


자리를 잡은 뒤 말한 소녀의 소개에 필라르는 잠시 옛적을 떠올렸다. 바이올렛과 함께 뛰어놀았던 꽃밭, 그 들꽃들……. 하지만 그런 아련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추억들을 전부 바이올렛에 관해 한정적인 것이었다. 그 외의 것들을 싸그리 다 지옥 같았다 해도 좋았다. 그런 필라르에게 불행의 원인이 된 영주의 딸인 시라가 좋게 느껴질 리 없었다. 하지만 필라르의 이런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시라는 재잘대며 말을 이어갔다.    


"날 모르겠지? 모를 거야. 나 계속 탑 안에서만 갇혀 살았거든. 아버님은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그렇게 좋은 분은 아니었어. 매일같이 술과 여자에 빠져살았고 연회를 벌여댔지. 딸에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하기야 나는 대를 이을 자격도 없었으니까 말야. 탑 안에서 나는 매일같이 기도만 하고 그도 아니면 자수만 놓고 살았어. 유모가 밖은 절대 못 나가게 했지. 시간만 나면 탑의 창문으로 너희들이 뛰어노는 걸 바라봤어. 너희들이 마을에서 제일 즐거워 보였거든. 나도 거기 끼고 싶다고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정말 부러웠어. 그래서……."


어쨌든 필라르와 바이올렛과 달리 배불리 먹고 지냈을 영주의 딸인 이 '시라'라는 소녀에게 필라르가 좋은 감정을 가질 리는 만무했다. 연이어 술잔만 비워내던 필라르는 큰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귀하게 자라신 몸이라 그런가.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군.'


필라르가 어떠한 호응도 해주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는 시라에게 표정을 굳힌 필라르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럼 노예상이 오는 것도 봤겠네." 

"어, 저기. 있잖아…, 그건…."

시라가 당황한 게 명백히 보였으나 필라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도 살아남은 필라르에게 시라가 말하는 것 전부는 배부른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바이올렛은 그 빌어먹을 백작의 종이 되었는데. 


"지금 그 얘기 하려고 날 붙잡은 거냐? 술값은 고맙다. 이제 얘기는 끝내자고. 추억 팔이는 지겨우니까."

"자, 잠깐 기다려!"


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필라르의 팔을 붙잡았다.  


"왜? 귀족이라서 평민이 이렇게 대하는 게 영 거북하신가?"


필라르가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지금 귀족이 아니고 좋게 쳐도 몰락 귀족이야. 그리고, 그렇다 해도 대접해 줄 생각은 전혀 없어. 꽤 오랫동안 혼자 지내왔지? 누군가가 보살펴준 흔적이 전혀 없잖아.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군."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시라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곤 맞다고 대답했다.


"하도 벌인 짓이 많다 보니 수도에 계신 전하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나 봐. 네가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곧바로 숙청이 되고 나는 그 와중에 하녀로 변장하고 도망 나와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


필라르의 귀에는 이어지는 시라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자기가 떠나는 것까지 지켜봤다는 게 불쾌하다면 불쾌했을 뿐.


"그래? 고생 많았겠군. 그럼 수고해."


뒤도 안 돌아보고 주점을 떠나려던 필라르는 자신의 팔을 잡은 시라의 힘에 막혀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여자가 왜 이렇게 힘이 세지?'


의문을 느낀 필라르가 시라를 노려보았다. 심지어 길드에서 싸울 때에도 누구에게 힘으로 져본 적 없는 필라르였다. 고작 또래 소녀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니,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혹시 이 시라라는 여자도 흡혈귀의 종인가?'


필라르는 잠시 그런 의심을 품었으나 이내 그 생각을 버렸다.


'아니야. 종이 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그럼… 이 여자는 대체 뭐지?'


필라르의 마음속에 시라를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싹텄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시라가 외쳤다.

"널 고용하겠어!"
"난 좀 비싼데."

필라르는 방금 전까지 생각한 것은 전혀 없던 일인 듯 차갑게 시라를 응대했다.

" 나도 알아, 불의 전령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길드에 찾아갔는데 네가 없어서 당황했지 뭐야. 그런데 이렇게 우연찮게 만나다니 주님이 인도해주신 게 분명해."

필라르의 태도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시라는 금화를 꺼내어 필라르의 눈앞에서 짤랑거렸다.

"날 내가 사는 마을까지 바래다줘. 안 그래도 길드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시비 걸어서 무서웠거든. 간단한 임무니까 갑옷은 필요 없어."

이어서 시라에게 마을 이름을 들은 필라르는 꽤 괜찮은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필라르 혼자라면 식은 죽 먹기인 거리였지만 여자 혼자 가기엔 무리가 있는 거리였기에 필라르의 도움이 필요할 성싶었다. 

'저 정도의 금화라면…….'

최근 저택에서 바이올렛에게 풀 죽은 모습만 보였던 필라르는 돈을, 그것도 꽤 거금을 단시간에 벌어온다면 조금은 저택에서 취급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라의 의뢰를 수락했다.

"의뢰, 수락하지."
"와! 그런데, 너 그 옷은 뭐야? 매일같이 갑옷만 입고 다닌다고 했는데……."

시라의 말에 그제야 필라르는 자신의 옷이 평소와 달리 단출한 평상복임을 깨달았다.

"설마 잠시 쉬는 중인데 내가 귀찮게 한 거 아니지?"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시라를 안심시키려 조금 전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필라르가 대답했다.

"아니야. 그래서 짐은 어디에 있지?"

조금 전까진 재잘대는 시라를 무시했지만, 필라르도 어디까지나 돈에 움직이는 의뢰를 받는 모험가였으므로 필라르는 조금 전보단 시라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시라가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주점을 떠나 출발하려는 순간, 험상궂은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익숙한 얼굴들인데."

작게 중얼거린 필라르가 남자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모를 수가 없는 얼굴들이었다. 길드에서 알게 모르게 필라르에게 시비 털던 조무래기들이었으니. 분명 이번에도 필라르에게 시비를 걸어오겠거니 했는데 그들은 평소와 달랐다. 필라르가 아닌 필라르의 옆에 있는 시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저, 저년이에요!"

조무래기 중 한 명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시라를 가리켰고 시라는 흠칫하며 필라르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라는 이 시점부터 필라르의 의뢰인이었다. 이 말은 곧 필라르가 시라를 지켜야 함을 의미했다. 굳이 검을 쓰지 않아도 필라르는 그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기에 일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무서웠어, 필라르……."

신음하는 남자들 사이로 시라를 데리고 나가던 필라르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매달렸던 어린 바이올렛을 떠올렸다. 필라르의 입가로 언뜻 씁쓸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둘의 걸음 뒤로 흙먼지가 나뒹굴었다.

**

한편, 저택에서 백작 하인리는 이 모든 상황을 감지하고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재미있는 것을 끌어들였구나. 역시 그 자는 쓸모가 있어."
"추격할까요?"

미동 없는 표정의 바이올렛이 물었으나, 하인리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당분간 지켜보자꾸나."

미미한 웃음기를 입꼬리에 걸치고 있던 하인리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잠들어 있던 처녀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꽂아 넣었다.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버둥대던 여자는 곧 잠잠해졌고, 하인리는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여자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그 자는 거부하고 있으나 자신도 모르게 계속 흡혈귀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지. 결국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채여갈 게다. 흡혈귀라면 그 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야."

하인리가 웃으며 말하는 동안 바이올렛은 내던져져 있는 여자들의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정리하고 있었다. 희고 창백한 시체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바이올렛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 시간, 필라르는 시라와 함께 먼 길을 떠나고 있었다. 길의 곳곳에 시체가 즐비했다. 인상을 찌푸린 필라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언제 또 흡혈귀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군."

흡혈귀들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그리 중얼거린 필라르와는 달리 시라는 도리어 안심한 듯 보였다. 마치 이곳이 안전지대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필라르는 그런 시라를 잠시 지켜보다가 길을 떠나기 전 해치운 길드원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분명 시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반응들을 보이진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필라르가 입을 열었다.

"길드에서 꽤 소란을 일으켰나 보군."
"어…,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 약들이 꽤 있는데 말이야…."

시라는 주춤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건 상대를 기절시키는 마법 약이고, 이건 상대의 눈을 당분간 멀게 하는 마법 약. 그리고 이건……."
"그만하지."

딱 봐도 말이 길어질 것 같아 보여 필라르는 시라의 말을 끊었다.

"그보다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는 건 마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응, 마력 보유자들이 태어나는 세상이니까 말이야…. 난 그런 축은 아니었어." 

시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더 파고들면 내 속만 들통나겠지.'

대화를 피하는 듯한 시라의 태도에 필라르는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뭘 하고 있어?"
"그냥 간단한 일이야…. 약초를 캐고, 약을 만들고, 실을 자아내서 옷도 만들고……."

무난한 주제로 말을 돌린 덕인지 우물쭈물 말을 이어가는 시라를 주의 깊게 바라보던 필라르는 곧 시라의 로브 자락에 튄 핏자국을 발견했다. 또한 시라의 하얀 손가락 사이마다 조금씩 남아있는, 씻어냈음에도 남아있는 팟자국을 발견했으나 이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바로 시라에게 묻기보다는 이를 알아챘음을 숨기는 게 이로울 것 같았기에.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말하는 시라의 목소리만이 조금 더 이어졌다. 해가 점차 기울고 있었다.

**

시라가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해가 거의 다 져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마을 분위기가 지금까지 봐왔던 곳들과는 약간 달랐다. 필라르가 지금까지 지나온 다른 마을들은 넝마가 굴러다니고 가게가 다 부서진 폐허와도 같은 모습들이었는데 유독 이 마을은 멀쩡했다.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필라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를 눈치챈 시라가 말했다.

"아! 이 마을은 흡혈귀님께서 관리해주셔서 괜찮아."
"흡혈귀라고?"

필라르의 미간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우리 마을의 흡혈귀님은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니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오히려 다른 흡혈귀들의 습격을 막아주시는걸? 마을 사람들에겐 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 셔."
"…… 그렇군."
"벌써 해가 다 졌어, 필라르.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러도록 하지."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을과 더불어 시라의 정체 또한 깊이 파고들 생각에 필라르는 자고 가라는 시라의 말을 받아들이고 시라의 집에 따라 들어갔다. 이름 모를 약초와 간단한 바느질감, 시간이 지나서 딱딱해져버린 빵들.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딱딱해진 빵들은 필라르가 어릴 때 지겹도록 먹던 빵이었는데, 귀하게 자란 여자인 시라가 저런 빵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 걸렸으리라고.

'…… 조금 안쓰럽군.'

그리 생각했으나 아직 시라는 수상해 보이는 점이 많았다. 필라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라는 문을 닫기 전에 빨리 빵집에 다녀와야 한다며 필라르를 이끌었다.

"어서 와! 이 시간엔 빵을 싸게 판단 말이야."

미처 짐을 풀지도 못한 채 필라르는 시라의 손에 이끌려 빵집으로 향했다.

'분명 나름 힘든 경험을 하면서 살아남았을 텐데 이렇게 밝게 사는 건 여러모로 대단하군.'

필라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윽고 도착한 빵집에서 시라는 남은 빵을 모조리 쓸어 다시 집까지 도착했다.   

"평소라면 무거워서 못 들고 왔을 텐데, 오늘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시라가 필라르의 앞으로 빵을 밀어 주었으나 필라르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걸 다 먹는다고? 여자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 같은데."
"괜찮아. 나 혼자만 먹는 게 아니고 심심하면 찾아오는 동네 꼬마들 나눠 주거든. 불쌍한 것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서 제대로 먹고 다니지도 못해."

생각 외로 배려심이 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필라르는 수북한 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시라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모든 불빛이 꺼지자 창밖에서 스며 들어오는 달빛을 보며 필라르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참 예쁜 달빛이라고 생각했다. 실없는 생각이었다. 필라르는 지금까지도 시라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잘 리 만무했다. 그런 필라르의 위로, 시라가 눈길을 떨어트렸다.  

"필라르, 날 의심하고 있지?"

필라르를 바라보는 그 눈은 바로 금안, 담피르의 눈이었다.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심해서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담피르. 필라르는 동요하는 속을 애써 감춘 채 시라를 노려보았다.

"그래,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아니야…, 나는 필라르가 마음에 들거든."

옅게 미소 지은 시라가 그대로 필라르의 옆에 누워 얘기를 시작했다.

**

시라의 아버지는 부패한 영주였다. 허구한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고, 그리고 그 여자들 중엔 시라의 어머니도 끼어있었다. 시라의 어머니는 힘이 약한 최하위급의 흡혈귀였지만 종족 특성상 최상의 미모를 가지고 있어 영주의 눈에 띄게 되었다. 단지 인간의 피가 필요했을 뿐인 그녀는 원치 않게 임신을 하게 되자 시라를 숲속에 버릴까 고민했으나 그래도 귀족으로 살라며 영주의 성 앞에 시라를 놓고 도망쳤다. 영주는 체면 때문에 시라를 거두지만 시라가 담피르임을 수치스러워하며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시라는 유모 말고는 아무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좁은 세상에서 자라왔다. 필라르와 바이올렛을 지켜보는 것은 시라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행위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예상이 오게 되면서 바이올렛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라르도 마을을 나가게 되어 한동안 쓸쓸히 시간을 보내던 시라는 그때부터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국왕의 귀에 부패한 영주의 진상이 들어가게 되었고, 영주가 숙청당하자 시라는 하녀로 변장해 성을 빠져나왔다. 그때부터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신분을 증명할 것조차 하나 없는 여자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시라는 허드렛일을 찾아가며 하녀로 일하고, 때로는 삯바느질을 맡아 하며 유모 노릇까지 해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은 다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민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하던 시라는 문득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필라르와 바이올렛.

'너희들에게 내가 가진 감정은 기만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너희가 너무 보고 싶어. 다시 한 번만 더 너희를 만나고 싶어.'

필라르와 바이올렛은 시라의 유일한 어릴 적 추억 중 하나였다. 그것도 아주, 아주 소중한 추억. 

**

"너도 쭉 외로웠겠군."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하던 필라르에게 시라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 길드의 남자들 내가 해친 거야. 그것도 마법 약 따위로 해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들의 무기를 뺏어 몇 놈 죽이기까지 했어. 이런 내가 무서워?"

"아니, 그다지…. 생각해보니 여자 혼자서 왕도에서 벗어난 길을 다니는데 너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어. 자신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많이 두려웠을 거야. 그렇지?"

그런 말을 하는 필라르에게 입에 발린 말이라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위로해준 사람은 없었다며 시라는 필라르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필라르는 그런 시라가 내심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일단은 작은 등을 안아 토닥이며 시라를 위로했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


Chapter 3. 새로운 흡혈귀


그리고 다음날, 필라르는 시라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다스린다는 소녀 흡혈귀에게 가게 되었다.

"아무리 갑자기 왔다지만, 인사는 드려야지. 이방인을 매우 경계하시거든. 소개하지 않으면 의심받을 거야. 참, 성함은 '클로이'라고 해. 다들 클로이님이라고 불러."

도착한 성에선 하인리 백작의 성과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왔구나."

이윽고 만나게 된 소녀는 외관은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이유 모를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하인리와 다를 바 없는 옛스러운 말투에, 필라르는 이 소녀가 진정 흡혈귀라고 느꼈다.

"수고했다."

소녀는 그 한마디만을 남긴 채 시라를 밖으로 내보낸 후 문을 쾅 닫았다. 당황한 시라가 문을 연신 두드렸으나 소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말씀이 다르잖아요! 필라르를 데리고 오면, 행복하게 해준다면서요?!"
"이것도 그 과정 중 하나란다, 아이야."

문 너머 시라에게 대답한 소녀는 엄청난 악력으로 필라르를 이끌고 고문실로 향했다. 형틀에 묶인 필라르는 클로이라는 흡혈귀의 손톱에 수차례 베이며 비명을 삼켰다. 그렇게 며칠을 고문 당하며 제대로 먹고 마시지도 못한 필라르는 반쯤 폐인의 꼴이 되었고, 채찍에 베인 것처럼 날카로운 흉터가 몸 이곳저곳에 남아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쾅, 하고 고문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클로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필라르를 노려 보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그 백작의 목적은 뭐지?"
"그딴 걸 알면 내가…, 크헉!" 

날카로운 손톱이 다시 한번 필라르의 몸을 할퀴었다. 그때였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부서지더니 곧이어 필라르의 대검을 든 시라가 들이닥쳤다.

'시라...!' 

만신창이가 된 필라르는 힘없이 속으로 시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반면 그런 필라르의 상태를 본 시라는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다니!"
"역시 힘이 좋구나, 담피르의 본성은 속일 수 없는 것이겠지."

시라는 곧장 대검을 들고 클로이에게 덤벼들었으나 곧 결계 하나에 제압되었다.

"아이야, 내가 널 받아준 이유는 흡혈귀를 사냥하는 법을 일절 모르기 때문이란다. 너는 내 앞에서 아주 약한 어린애와 다를 바 없지."
"부탁이에요, 필라르는 아무 잘못 없어요! 대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는 그 종을 잡아오겠어요!"

무릎을 꿇으며 부탁하는 시라를 보며 필라르는 바이올렛을 떠올렸다. 하지만 시라가 바이올렛을 해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슬슬 나도 질려가던 참이란다. 털어봤자 나오는 것이라곤 없어서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필라르는 고문틀에서 풀려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려가서 네가 좋을 대로 하려무나. 샅샅이 조사해보니…, 이 자는 계약도 안 한데다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구나."

시라는 이내 고문틀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필라르를 부축해 급히 성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는 클로이의 눈동자는 한없이 붉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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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교계는 나라가 떠들썩한 탓에 난리가 나 있었다. 아직까지 귀족들에겐 큰 해가 간 게 없었으나 언제 영향이 끼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들 또한 술렁거렸다.

"하인리 백작께서는 무탈하신가요? 전 어젯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답니다."
"하인리 백작은 이런 날조차 부드럽고 상냥하기 그지없군요."

몰려드는 귀족 부인들에게 변함없이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로 응대하던 하인리는 연회가 끝나고 모두들 물러갈 무렵에야 테라스석으로 홀로 자리를 옮겼다.

"나오거라, 바이올렛."

그의 본성을 드러낸 말투에 지붕에서 바이올렛이 훅 떨어져 하인리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먼저 가 있도록 해라."

하인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바이올렛이 필라르가 머물고 있는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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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필라르는 시라의 부축을 받으며 성 근처의 숲으로 피신해 있었다. 다리가 풀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필라르를 부축하는 시라는 확실히 담피르라는 것을 증명하듯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늘게 뜬 필라르의 시야로 필사적으로 필라르를 부축하며 걸어나가는 시라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필라르의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시라와 필라르는 함께 주저앉았다.

"미안해, 필라르. 널 배신한 건 고의가 아니었어. 클로이님이 왕도에서 하인리백작이 출몰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그들을 캐보라는 임무를 내리신 거야. 그들의 모습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바이올렛이라는 것을 알아봤어. 거기다 우연찮게 너까지 만나게 되어 기분이 좋았지만한편으로는 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어. 그래도 너와 함께 있는 짧은 순간이 거짓이라도 즐거웠어……."

시라는 계속해서 필라르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통곡했다. 그런 시라를 바라보던 필라르가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나 담피르 모두, 흡혈귀 입장에선 체스 말에 불과해. 애초에 세계의 주인은 그들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엮어 나가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거야. 처음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 괜찮아, 시라."
"다음부터는 내가 적이 될지도 몰라, 필라르. 나는 이 마을에 신세를 지고 있는 이상 너희와 싸울 수밖에 없어. 그때도 나를 용서할 거야?"

울음소리가 지워지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묻는 시라를 응시하던 필라르가 씁쓸함이 배인 헛웃음을 지었다.

"나에겐 용서할 자격도, 용서하지 않을 자격도 없어. 그리고 내 용서는 중요하지 않아……."

성치 않은 몸의 필라르가 쿨럭이며 기침을 뱉었다. 하늘 위로 검은 새가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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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성에 있던 클로이는 강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오는 것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공중에서 나타난 것은 수백 년 전에 앙숙이었던 하인리 백작이었다.

"네… 네놈은!"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네놈이 이 마을을 들쑤시게 놔둘 성싶으냐!"

능글맞은 미소를 입가에서 지운 하인리가 그렇게 소리친 클로이를 비웃듯이 우아한 손짓 한 번으로 클로이의 결계를 파괴시키고 자신의 결계를 덮어씌웠다.

"난 깔끔한 걸 좋아하지. 여러 흡혈귀들이 모여 투쟁을 벌이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네가 관리하는 이 마을도 아무 방해 없이 내 손에 떨어트려 보여주지."

한껏 클로이를 도발하는 하인리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렇게 둘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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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바이올렛은 필라르의 기척을 쫓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올렛은 숲에서 시라의 부축을 받고 있는 필라르를 발견했고 곧장 단검을 꺼내들었다.

"당장 그에게서 떨어져라."
"바이올렛, 그러지 마. 괜찮은 애야. 지금까지 날 부축해줬고…."

눈을 뜬 필라르가 그런 바이올렛을 저지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할 때와는 달리 너무도 상냥한 필라르의 어투에 놀란 시라는 곧이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바이올렛과 내가 같을 리 없잖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결의에 찬 표정으로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필라르의 목에 겨누었다.

"가까이 오지 마! 더러운 흡혈귀의 종!"

갑자기 포악해진 시라의 말투와 행동에 필라르는 적잖이 놀랐으나 몸을 추스를 겨를은 없었다.

"가까이 오면 이 남자의 목을 그어버리겠어!"

그러나 바이올렛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오히려 필라르에게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칼이 안 보여?!" 

시라는 초조해진 듯 소리쳤지만 여전히 바이올렛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그 남자의 목을 긋지 못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시라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필라르의 목에 조그만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그걸 보는 바이올렛의 표정은 한없이 무감했다.

"어떻게… 어떻게……! 너희는 소꿉친구였잖아. 맞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차갑게…."
"대답해봤자 당신은 절대 알 수 없을 겁니다." 

차갑게 대답한 바이올렛이 단검을 겨눈 채 시라에게 달려들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퍼졌다. 시라가 아닌, 필라르의 것이었다. 시라의 앞으로 뛰어들어 칼을 맞은 필라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쓸데없는 짓을." 

드물게 짜증의 감정을 담아 말한 바이올렛이 단검의 피를 털어냈다.

"꺄아아아아악! "

고요한 한밤중의 숲에 시라의 절규가 뒤섞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부탁이야…. 바이올렛,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가까스로 입술을 떼던 필라르는 결국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뭘 해볼 겨를도 없이, 시라가 곧장 자신의 가슴에 단검을 깊이 찔러 박았다. 한가득 쏟아져 나온 피를 시라는 곧장 필라르의 상처에 떨어트렸다. 분명 같은 색의 피였음에도, 시라의 피는 한 방울씩 떨어트릴 때마다 위협적인 아우라를 뿜어내었다.

"필라르, 필라르…."

다 죽어가면서도 목소리를 내는 시라는 애처로웠지만 그걸 가장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아마 담피르의 목숨을 희생한 피는 치유력이 있었던가.'

그 둘을 냉정히 내려다보던 바이올렛이 생각했다.

그리고 충분히 피를 떨어트렸다 싶자 시라는 곧바로 자신의 심장을 한 번 더 찔렀다.

"커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피를 한가득 토한 시라는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차갑게 변한 바이올렛을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너하고는…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웃기는 소리."

바이올렛이 같잖다는 듯 시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것도 어찌 보면 기만이겠지. 그래서 너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줄 거야. 하지만 필라르는, 필라르는 괜찮을 거야……."

시라는 안심한 듯 눈을 사르르 감고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죽음이었다.

**

시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클로이를 처치한 하인리는 여유롭게 바이올렛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내 걱정은 할 것 없다. 그동안 인간의 피를 자제하고 있던 탓인지, 너무도 약해져 있더구나. 시시할 정도로 쉬워졌어. 과거에 대치했던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까지 들더구나."

그리고 하인리는 붉은 피가 낭자한 곳에 쓰러져 있는 필라르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보다는 빠르지만 이 자를 종으로 만들어야겠다. 뭘 먹일 수는 없는 상태인 것 같으니 보다 거친 방식으로 피를 주입해야겠어."

필라르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하인리는 이어 사내놈의 목덜미를 무는 취미는 없다며 필라르의 손목을 콱 물고 피를 주입했다. 한창 피가 잘 들어가던 상태에서 급작스레 하인리가 큭, 하는 소리를 내며 피를 탁 뱉고 낮게 신음했다.

"주인님?!"
"걱정할 것 없다. 조금 사고가 있었을 뿐이야."

하인리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땀이 맺히는 것을 목격해 놀란 바이올렛을 진정시킨 하인리가 보기 드물게 재밌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사태가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역시 이 자는 원치 않게 흡혈귀의 흥미를 끌어들여."
"왜 그런 것입니까."
"이 자에게는 담피르의 피가 주입되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히 흡혈귀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지. 그러나 이 자에게 피를 준 담피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이야. 이런 세상에서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것은 저주에 가깝단다, 바이올렛. 산 채로 자신의 몸이 분해되는 걸 지켜보는 것과 자신이 미쳐가는 걸 보는 것은 다르지 않게 비참하지. 차라리 정육점의 동물들처럼 완전히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게다. 이 배려에 가까운 행동이 저주로 돌아온 것을 알면 표정이 어찌 될지 기대되는군." 


그 말을 들은 바이올렛은 고개를 숙여 주인에게 감탄과 경외심을 표했다. 그게 바이올렛의 반응의 전부였다.


Chapter 4. 흡혈귀의 종, 필라르


모든 것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필라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눈만 떴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신체능력이 향상되고 이성적으로 변한 것이 느껴졌다. 꽤나 큰일이 있었음에도 그 일을 회상했을 때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학살에 다리까지 풀리면서 동요했던 과거의 그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 마치 곤충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필라르를 지켜보던 바이올렛이 물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필라르는 예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바이올렛에게 대답했다.

"그보다 마을은 어떻게 됐지? 주인님의 지배하에 놓인 건가?"

그렇게 증오했던 백작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바이올렛은 계약이 무사히 끝났음을 느끼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예, 필라르. 수고스럽겠지만 오늘부터 할 일이 많습니다."
"알아. 우선 주인님의 식사부터 준비하지." 

무의식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죽여야겠다고 느낀 필라르는 자신의 대검을 들고 성큼성큼 방을 걸어나갔다. 그렇게 저택을 빠져나가는데 문득 부엌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시커멓게 변한 빵이 이상하게도 필라르의 눈에 들어왔다.

"실수했군요. 저택을 당분간 비우다 보니 버리지 못한 빵이…."

바이올렛의 말에 아랑곳 않고 필라르는 그 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뭔가 터지듯이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자신의 눈물에 의문을 느끼며 소매로 눈물을 닦는 필라르를 보며 바이올렛이 생각했다.

'그게 당신에게 남아있는 인간적인 부분이겠죠. 언젠가는 그 부분이 당신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바이올렛은 필라르의 팔을 잡아 이끌고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검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