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룡전하] 백목련

波濤 2018. 4. 1. 21:59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감정을 설명하라 한다면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그나마 가까운 단어를 꼽자면 주상이 신룡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경외심이었다. 인간만이 모여있는 세상에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신비함과 자신이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혀 느낄 일이 없었으니까. 아직 붓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어릴 적, 방문을 빠끔히 연 어린 주상의 까만 눈동자에 눈이 부실만치 빛나는 금빛이 내려앉았다. 방에 앉아있는 그는 검고, 금빛으로 빛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위기만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그저 뒷모습을 바라볼 뿐임에도 그랬다. 바스락, 하고 방문 앞 바람결에 날아온 작은 낙엽에 하얀 버선이 내려앉아 난 소리에 주상은 작은 두 손으로 힉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아바마마께서 절대 멋대로 드나들어선 안 된다고 하셨는데. 아바마마에게 꾸지람을 들을 생각에 울상이 되려던 찰나 조금 열려있던 방문이 안에서 활짝 열렸다. 


"막내 왕자님 아니십니까." 


뒷모습만으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그는, 아바마마께서 절대 무엄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신신당부한 대상인 그는 주상의 상상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주상을 불렀다.


"어찌 이곳까지 발걸음 하셨습니까. 지금은 글공부 시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글공부라는 말이 나오자 조금 전 두 손으로 막았던 주상의 입에서 히끅 하고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입을 막는다고 멈출리 없는 것을 애써 참아보려 하는 주상의 모습이 귀여웠던지 미소를 지은 신룡은 주상을 방으로 들이곤 궁녀를 불러 찬 매실차를 한 잔 가져오라 명했다. 그리고 잔뜩 긴장해서 몸을 굳히고 있는 주상의 앞에 앉아 여전히 온화한 얼굴로 주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글공부가 그리 하기 싫으셨습니까."


신룡의 물음에 주상은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글공부가 하기 싫어 신룡폐하의 궁으로 도망왔다는 것이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크게 혼이 나리라는 생각에 그런 것이었다. 신룡은 궁녀가 내온 매실차가 너무 차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주상에게 찻잔을 건네주었다.


"드시면 딸꾹질이 멈출 겁니다. 이 정도로 의술사를 부르는 것은 아무리 왕자님이라 해도 과한 처사일 터이니."


신룡의 뒷말은 분명 농조가 섞여 있었으나 어린 주상에게 그것까지 파악할 여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찬 매실차를 꿀꺽꿀꺽 삼키고서야 트인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쩐다. 왕자님의 글공부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은 저와 함께 글공부를 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신룡은 한가득 쌓인 상소문을 옆으로 밀어놓고 붓글씨를 쓸 하얀 종이를 꺼냈다. 왕궁에 납품되는 종이도 최상의 질을 갖춘 것들인데, 신룡이 꺼낸 종이는 평소 주상이 붓글씨를 연습하던 종이보다 더 윤이 나고 보드라운 듯 했다. 멍하니 종이를 보고 있는 주상의 앞에 신룡은 먹이 갈려있는 벼루와 붓을 내려놓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주상은 학문을 익히는 것에 그다지 소질도 취미도 없었다. 형들이 내로라 할 만한 시조를 읊을 때에도 주상은 노랑색 날개를 뽐내는 나비나 구경하는 것이 다였고, 형들처럼 어떤 자리를 꿰차겠다는 욕심 또한 없었다. 신룡은 그런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 붓을 쥐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주상의 뒤로 가서 포옹하듯 주상의 손을 겹쳐쥐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글공부를 하시는 겁니다."


신룡이 붓을 내려그으면, 주상의 손도 따라서 붓을 내려그었다. 그러니까, 신룡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주상의 작은 손도 움직였다. 항상 멀찍이서만 바라보던 신룡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주상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흘긋 돌린 고개에도 화를 내지 않고 금빛 눈을 맞추어 주는 그가 주상은 그리 위험한 인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물만이 그어지고 번져나갔다. 



** 



주상이 열 다섯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사계절을 보낼 때마다 주상은 신룡의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 모두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어린 시절 신룡의 방을 몰래 훔쳐보다 들켰음에도 혼나지 않고 그곳에서 그와 함께 붓을 잡았던 것을 주상은 잊지 않았다. 어쩌면 잊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궁의 뒤뜰에 심어져 있는 꽃나무들도 겨울에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그것이 이치였다.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바라보던 주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눈을 밟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 소리가 퍽 듣기 좋다 생각하던 와중에 주상의 것이 아닌 다른 이의 발자국 소리가 났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이 뒤뜰에 누가 또 걸음을 한 것인지. 뒤돌아본 주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폐하, 어찌 이곳에."

"하하, 종종 들르는 곳인데 왕자께서 계실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던 인물이 바로 눈앞에 서있는 것은 꽤나 생경한 기분이었다. 주상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선 채 신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주상이 어릴 적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금빛으로 빛나는 용이 그대로 인간으로 실현된 모습. 어쩐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기 어려워 주상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폐하께서 산책을 하시는 줄 모르고 미처 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만……."  

"이젠 왕자께서도 저를 어려워 하시는군요."


뜻밖의 말에 주상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신룡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던가.


"어릴 적에는 궁에 멋대로 들어오곤 하셨는데 말이지요."


그리 말하며 웃는 신룡의 모습이 퍽 낯설면서도 어쩐지 어릴적 보았던 그의 얼굴이 겹쳐져 주상은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까만 눈동자만을 데록 굴렸다. 신룡이 주상을 이리 편하게 대해준다 한들 주상의 위치에서 신룡을 편하게 대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었기에. 마치 어릴적 처럼 신룡은 그 속을 다 안다는 듯이 주상을 내려보았다.


"주상은 좋아하는 꽃이 있습니까." 

"……흰 목련을 좋아합니다."


주상이 겨우 뱉어낸 문장의 끝에 신룡의 손끝이 움직였다. 앙상한 가지의 끝에 눈부시게 하얀 백목련이 피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잇따라 옅은 분홍빛 벚꽃과 자목련도 가지 끝에 꽃을 피웠다. 겨울나무에 피어난 꽃들의 향연에 주상이 놀라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에도 뒤뜰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심어져 있는 꽃나무들은 주상의 눈이 닿는 가지마다 봄의 생기를 찾았다.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듯 황홀하게 피어있는 꽃들의 정경에 주상이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는 동안 어느새 주상의 옆에 선 신룡이 작은 소리로 주상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군자들에겐 비밀입니다. 주상."


그 말에 잔뜩 긴장했던 것이 눈꽃이 녹는 것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어릴 적 손을 겹쳐 붓을 내리 그었던 커다란 손의 온기가 생각나 굳어있던 주상의 입꼬리에도 옅은 호선이 그려졌다. 


"꼭 비밀로 하겠습니다."


어쩌면 봄 보다 더 활짝 피어있는 듯한 꽃길을 함께 걷는 두 사람의 등뒤로 분홍빛 꽃잎과 하이얀 꽃잎이 뒤섞여 바람에 흩날렸다. 바야흐로 겨울에 도달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