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헬님 알티 이벤트 리퀘
눈을 뜨니 새삼스럽게 봄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것 같은 손끝을 여린 이파리들이 간질였다. 이 위에는 눈꽃이 내리 앉지 않았던가. 그 새삼스러움에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정원을 살피던 하난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난아."
봄과 같은 소리였다. 그러니까, 춘매의 상실과 더불어 이 궁궐 자체에 서리가 내려앉지 않았던 시절 성군의 목소리였다. 토끼 눈을 뜬 하난이 휙 고개를 돌리자 약간 당황한 듯 웃는 신룡의 얼굴이 곧바로 하난의 시야에 들어왔다.
"…폐하?"
"그래, 내가 널 놀라게 했나 보다."
"아뇨, 아닙니다. 다만 저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많이 놀랐느냐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과 목소리에 묻어나는 온기, 그 밖에도 신룡을 둘러싸고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지금 하난이 모시는 현재의 신룡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꿈. 그래, 한낱 수마睡魔에 이끌려 과거의 성군을 찾았구나. 그리 생각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서도 하난은 쉬이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짓이라 할지 몰라도 꿈에서만큼은 그리고 그리던 과거의 성군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난의 눈망울에 눈물이 핑 돌았다.
"폐하."
목소리가 완전히 물기로 얼룩지기 전에 말해야만 했다. 하난은 작게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금빛 눈동자가 하난의 앞에서 일렁였다. 오롯이 충신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자의 눈빛이었다.
"부디 자애로운 왕이 되어 주십시오. 백성들의 고달픔을 굽어살펴주시고, 그들의 원망을 바늘처럼 여기지 마시옵고, 손끝의 날씨를 항상 살피시고, 그리고……."
"그래, 그래. 알았다. 하난아. 그러니 그만 울거라. 내 노력이 많이 부족했나 보구나."
봄바람이 불었다. 신룡의 가벼운 웃음이 그에 실려 하난의 귓가에 내리 앉았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실소가 아닌, 하난의 급작스러운 눈물이 당황스러워 터트린 것이 선연한 웃음소리였다. 빙긋이 웃은 신룡이 한쪽 팔을 뻗어 하난의 어깨를 토닥이며 읊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래도 나의 곁에 이런 네가 있어 다행이구나."
그 말과 동시에 짙은 금빛 눈동자를 하난이 대면하는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울려오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같은 목소리였으나, 또한 다른 소리였다. '하난. 하난. 어디 있기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냐!' 그것은 봄에 머무를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부름과도 같았다. 하난은 다시금 제 앞에 선 주군을 마주했다. 앞으로도 있고, 다시는 없을 나의 성군이여.
"부디 잘 지내어 주십시오, 폐하."
큰 숨. 꿈에서 깬 하난의 가슴팍이 올랐다가 느리게 꺼졌다. 눈가의 눈물자욱은 마치 호접지몽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정녕 과거였을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주군의 부름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 난초궁이 유난히 바람에 우는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