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우진] 황홀경 (恍惚境) -1
회령의 어린 시절은 부유했다. 고작 그 한 문장이 어린 회령의 짧은 생을 일축시킬 수 있었다. 윤이 반들이 나는 검정 에나멜 구두를 신고 신발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린 회령은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외출한다는 것에 들떠 두근대는 마음에 배싯 지어진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기사가 운전하고 가는 차를 타는 동안 회령과 함께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께서는 그런 회령을 진즉 눈치챘다는 듯 회령의 손 위에 가는 손가락을 얹고는 도착해선 웃지 말아야 해, 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아주 거추장스러운 일을 떠맡은 사람 같은 느낌을 주어 회령은 네, 하는 짧은 대답을 하곤 얌전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사이로 아직까지 환히 불이 밝혀진 창들이 무수한 건물들이 회령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회령이 도착한 건물엔 아주 큰 글씨로 그 건물의 용도가 쓰여 있었다. '상조 장례식장'. 건물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모두 검은 정장 혹은 검은 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 하얀 핀을 꽂거나 검은 두 줄이 그어진 완장을 팔에 차고 있거나 했다. 회령이 걸음을 떼는 곳마다 여러 사람의 울음소리와 곡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꽃 장식 중심엔 네모진 사각 틀 액자가 있었고 그 안엔 회령이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두가 우는데 사진 속 사람만 웃었다. 회령은 이 풍경이 가히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눈을 판 것도 잠시 회령은 곧 어머니의 손에 끌려 건물의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고요했다. 그러나 꽃 장식 안에서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똑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 다른 방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이 방은 회령의 또래 나이로 보이는 소년 하나만이 완장을 찬 채 서있었다. 두 줄이 그어진 완장은 직계가족만 차는 것이라는 걸 알기엔 아직 회령은 어린 나이였다. 소년은 울지 않고 서있었다. 눈 밑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입은 꾹 다물려 있었다. 회령의 아버지는 소년을 보고 탄식 같은 한숨을 쉬었다. 회령은 호기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굳이 직접 찾아올 정도라면 분명 뭔가 대단한 애겠지, 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 저 애는 누구예요?"
"… 앞으로 너와 함께 지낼 아이다."
"그럼 우리 가족이랑 같이 사는 거예요?"
"그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아버지는 방을 나섰고 어머니는 회령에게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란 말을 남긴 채 급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나갔다. 소년과 함께 덜렁 둘만 남겨진 회령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다가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털썩 앉아 액자 속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환히 웃는 얼굴은 소년과 닮아 있었다. 비록 회령의 앞에 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엔 웃음은커녕 작은 웃음기조차 없었지만. 멀거니 소년을 바라보던 회령이 몸을 일으켜 소년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 너 이름이 뭐야?"
회령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소년은 회령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잠시 상황 판단을 하는 듯 보였다.
"… 김우진."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너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 거래."
"…….알고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우리 집에서 사는 게 싫어?"
"싫은 건, 내가 아니라."
우진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방으로 돌아온 회령의 어머니가 회령의 팔을 홱 잡아끌었다.
"회령아, 가자."
"우진이는 저희랑 같이 안 가요?"
"… 우진이는 우리랑 따로 갈 거야. 가자."
회령은 평소와 달리 세게 회령을 잡아끄는 어머니의 손에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회령과 우진의 첫 만남이자 운명의 붉은 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