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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ㅊ님 연성교환 글

波濤 2019. 2. 14. 21:32


이상하리만치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딱히 흐린 날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름 하나 없이 쨍한 날은 어쩐지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다. 그런 날씨와는 상관없이, 헌터는 익숙하게 그의 모자를 검은 리본으로 구현해냈다. 대표적인 것만 꼽자면 죽은 사람과 과거, 감정 등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모자는 때로 헌터를 곤란하거나 불쾌하게 만들었다. 마치 델러노의 유령이 눈앞에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헌터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미 죽어버린 그림자와 같은 존재. 헌터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헌터는 가출한 책들을 찾아야 했다. 델러노의 반대편 길로 걸음을 옮기는 헌터의 뒷모습으로 검은 인영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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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회수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 건 금방이었다. 금세 석양이 졌고 주홍빛 햇빛이 헌터의 보랏빛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몇 권의 책을 더 회수했을까, 금세 어둠이 내린 하늘을 본 헌터는 잠들 만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끝내 고른 자리는 이파리가 무성한 한 나무 아래였다.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자 종일 걸은 피로가 몰려왔다. 검은 어둠은 더 짙어졌고 헌터의 눈 역시 스르르 감겨왔다. 잠들기 직전 눈앞으로 연한 하늘빛이 잠시 스친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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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자지껄한 아이들의 말소리와 그중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는 원장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고아원을 떠나 다른 집에서 지내게 될 거란 선생님의 말에 헌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윈스턴 가문. 자신이 앞으로 지내게 될 곳의 명칭을 들을 헌터는 입을 달싹여 한 번 더 그 이름을 되뇌었다. 헌터 윈스톤. 입양된 헌터가 가지게 된 새 이름이었다. 윈스턴 가문에 입양된 아이는 헌터 하나만이 아니었다. 헌터와 같은 처지인 아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더욱 가족 같았다. 아픔을 겪어본 이는 아픔을 알았기에. 헌터를 포함한 입양된 아이들은 가문을 위한 병사로 길러졌다. 헌터는 아이들 중에서 높은 성공률을 보였으나, 임무에 실패한 아이들이 죽거나 쫓겨나는 것은 왠지 석연치 않았다. 그래도 헌터는 가문을 위해 충성했다. 하지만 균열은 조용히 생기기 마련이었고 결국 이상함을 느낀 아이들은 갈라져 파벌을 만들었다. 헌터의 눈앞에서 같이 자란 형제들이 죽어나갔다.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헌터는 델러노의 앞에 서있었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연한 하늘빛 눈동자. 그가 자신을 죽이라고 했을 때 헌터는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러나 헌터의 망설임으로 달라지는 결과는 없었다. 헌터가 망설이는 사이, 델러노는 직접 들고 있던 칼로 자신을 찔렀다. 윈스턴 가문의 자멸이었다.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본 헌터는 길을 배회하며 멍한 눈으로 돌아다니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도서관에 도착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