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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카도님 맞커미션

波濤 2019. 3. 16. 17:52



"그만둔다고!"


파비안은 비명인지 발악인지 모를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대학 입시를 거치면 오는 또 하나의 입시라 불리는 연구실 배정에서 파비안은 실패한 것과 다름없었다. 남들이 선배인 대학원생들에게 장문의 편지와 같은 연구실 입성 메일을 보낼 때, 이 연구실에 관심이 있으니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짤막한 메일을 보냈는데도 연구실 입성에 통과한 대가일까? 허구한 날 두루뭉술한 미래만 말하며 와중에 대학원생들을 차별하기까지 하는 교수에게 질린 지는 오래였다. 분명 비슷한 퀄리티의 논문임에도 교수가 평소 대놓고 차별하던 원생의 논문은 패스, 파비안의 논문은 엄청난 혹평에 탈락이라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책상에 쌓여있던 서류 종이들이 흩날렸고 꽤 두께가 있는 고고학 서적들은 파비안의 손에 의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다 질려…, 다 질린다고."


씩씩대던 파비안은 곧 동기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연구실의 서류며 책들을 엉망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파비안의 다혈질적인 면모는 동기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으므로 동기들은 그에게 화를 내기보단 우리를 벗어난 맹수를 진정시키듯 대했고 파비안은 캐비넷을 짚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거세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조각난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잘게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일었다. 파비안은 아, 하고 탄식 비슷한 소리를 내었고 깨진 유리들은 그저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폭발하듯 깨져버린 캐비닛의 유리에서 작은 유리 조각들이 이어서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제외하자면 그랬다.


"이건 내가……."


파비안의 말에 동기들은 식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의도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파비안의 능력에 의해 유리가 굉음을 내며 깨져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동기들의 판단 하에 파비안은 연구실에서 끌려나갔다.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그가 없는 연구실에선 억울함이 가득 담긴 한마디만이 웅웅대다 사그라질 뿐이었다.  


**


"진짜 관둘까?"


스스로에게 묻던 파비안은 책장에 책을 꽂던 와중 떨어트린 책의 모서리에 발등을 찧었다. 


"악!"


얼얼한 발등을 부여잡고 있던 파비안은 속에서 울컥 치솟는 무언가에 다짜고짜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짙푸르다 못해 검은 하늘의 새벽에, 그 시각에 어울리지 않게 마구 달리고 있는 한 인영의 위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소나기에도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아 파비안은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파비안의 눈 앞에 아담한 바 하나가 파비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는 것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 이런 날은 술이나 죽도록 마시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파비안은 바의 문을 열었다. 문에 걸려있는 작은 금색종이 딸랑 하는 작지만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자리에 앉은 파비안에게 바텐더가 메뉴판을 내밀며 흘긋 시선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딱히 오랜 고민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잔뜩 비를 맞고 들어와 빗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점주 입장에선 당연히 달가운 손님이 아니겠지. '그런데 뭐, 어쩌라고?' 바텐더가 뭐라 첨언하지도 않았으나 이미 뻔뻔스런 마음을 먹은 파비안은 바텐더에게 여러 종류의 칵테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한 잔씩."


분명 주량이 안 되는 것을 알았음에도 오늘은 그를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살다 보면 내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않은가? 파비안은 오늘이 그에게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다. 칵테일을 천천히 음미하기 보다는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신다는 말이 가깝게 파비안은 술을 속에 쓸어넣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는 말을 체감하며 파비안은 무심코 옆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이 흐릿해서 보이지도 않는 사람을 붙들고 파비안은 굵은 눈물 방울을 뚝뚝 흘려냈다.   


"내가 너무 힘들거든. 참아야 해? 다 그만두고 싶다고."

"힘들면 관둬. 어차피 다 힘들어."

"그래? 그쪽도 힘들어?"

"어. 사람들은 다 힘들어."


그냥 주정뱅이로 치부하고 넘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파비안의 옆에 앉아있던 이는 덤덤한 말투로 그리 읊조렸다. 바의 창문엔 아직도 흘러내리는 빗물과 창에 튀기는 빗방울들이 만연했는데 꼭 이름도, 무엇도 모르는 이 낯선 사람의 주변에만 낮고 건조한 공기가 깔린 듯해서 파비안은 왠지 모르게 뒤집힌 듯했던 속이 점차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난파되기 직전의 배가 고요한 등대의 불빛을 발견하고 그를 좇을 때 이런 기분일까. 파비안은 마지막 술잔을 비웠다. 빗줄기가 천천히 가늘어지고 있었다.


** 

 

"으…, 머리야." 


벅찬 알코올 탓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파비안은 겨우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날씨가 쌀쌀하니 검은 목티에, 갈색 코트….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연구실에 갈 채비를 마친 파비안이 집을 나섰다. 쌀쌀할 거라고 생각한 날씨는 의외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해는 어제와 달리 높이 떠있었다. 길을 걷던 도중, 문득 파비안은 멈춰서서 어제 새벽 무작정 비를 맞으며 달렸던 길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파비안의 입꼬리가 한 쪽만 올라갔다. 하, 하는 작은 헛웃음이 입술 새로 새어나왔다. 어제의 감정이 몰아쳐 왔기 때문일까. 파비안은 새벽의 빗물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고 물을 머금어 생생해진 초록 이파리와 작고 하얀 들꽃들이 길가에 피어있었다. 마치 어제 비가 오기는 했냐는 것처럼. 어젯밤 하늘에 먹구름이 자욱했던 적이 있냐는 것처럼. 파비안의 머리카락에 햇살이 내려앉아 그의 금빛 머리칼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갈색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햇빛은 마치 금색 꽃가루 같았고, 파비안이 달리는 길에는 푸르른 잔디가 깔려있었다. 어젯밤과 완전히 대비되는 날씨는 마치 어제 파비안이 연구실에서 일으켰던 일이 지금의 날씨처럼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게 연구실에서의 일이든, 파비안 개인의 일이든. 지금만큼은 파비안의 머릿속에 어제의 의도치 않았던 사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맑고 상쾌해진 공기와 파아란 하늘, 그 위로 떠가는 흰 구름, 길가에 깔린 푸른 잔디밭, 흰 들꽃만이 존재할 뿐. 들꽃의 뒤에 모여있던 토끼풀 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아낸 파비안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