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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절정은 어디까지인가?

波濤 2017. 11. 30. 15:02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대적 부터 고민해왔으나 결코 정의내리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감정이다. 희, 노, 애, 락. 최소한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해둔, 사실은 더 무한한 것이 남아있는 사람의 감정 중 이 책은 희喜를 내세우고 있다. 제목부터가 사는 기쁨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표지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즈미와 그에 비해 무표정해 보이는 마코토가 이 책은 순순히 기쁨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처음은 방송위원회인 마코토가 내보내는 아침 방송으로 시작된다. 무난하게 오늘의 날씨를 알리는 말과 안부를 묻는 멘트. 버스 안에 앉아 그를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이즈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버스의 승차버튼이 클로즈업 된다. 이어서 보여지는 음악이 틀어져 있는 기기의 화면. 둘 모두는 단순히 버튼만 누르면 정지하는 것들이지만, 이즈미는 그 무엇도 누르지 않는다. 마치 갈수록 커지기만 하는 이즈미의 심장 소리처럼.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는 이즈미의 표정은 모순적이게도 삭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서, 본격적으로 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즈미와 마코토의 사랑은 특별할 것 없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즈미의 급진으로 이루어진 사랑. 미적지근하고 로맨틱한 시작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둘의 성향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즈미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마코토에게서 무언가를 찾았고, 그것은 집착에 가까웠다. 마코토는 이즈미를 완벽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나 이즈미의 결핍은 그런 마코토였던 것이다. 이즈미는 마코토의 눈빛, 웃음, 손짓 하나마다 생경한 떨림을 느꼈고 그것은 지치지 않았다. 질리지도 않았다. 권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착각을 하곤 한다. 권태나 질투 같은 감정은 독이 될 뿐이라고. 그러나 어떠한 관계에서 항상 처음 접한 듯한 떨림만을 느낀다면 그 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을까? 어느 부분에서의 권태로움과 그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분명 관계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즈미는 자신의 변하지 않는 생경함이 기형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다. 물론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감정이라는 건 고칠 수가 없다. 고쳤다고 세뇌를 걸고 스스로를 속일 뿐. 


마코토의 사랑은 모호하다. 굳이 따지자면 아가페에 가까운 인간상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고, 그로 하여금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마코토가 무엇을 하고 있건, 정작 무엇을 하느냐 묻고 마코토에게 대답을 들은 이즈미의 반응은 한결 같다. 사랑한다는 말이다. 마치 사랑한다는 말만을 뱉기 위해 마코토에게 말을 거는 사람처럼. 이즈미의 결핍은 마코토였으나, 마코토의 결핍은 이즈미를 만남으로 두드러졌다. 마치 서로 사랑하는 장미 넝쿨이 서로를 가시로 찌르는 것처럼. 마코토에게 이즈미는 눈이 아플 만큼 부신 햇빛이었고 그것은 넘치게 벅찬 빛이었다. 우연히 하굣길에 친구들에 의해 품에 떠안겨진 고양이의 심장박동 소리를 느끼던 마코토는 그 일정한 박동에서 이즈미를 떠올린다. 이즈미의 환상을 겹쳐 봤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 마코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한 것은 고양이를 안았던 마코토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뒤에서 이어진다.


마코토는 이즈미와 식사를 하던 도중, 이즈미의 말에 무어라 대꾸를 하려다 접시를 깨트린다. 황급히 그 파편들을 정리하려 하던 마코토의 눈에는 깨진 접시에 베여 피가 나는 이즈미의 손이 눈에 들어오고, 당황해서 이즈미의 손을 잡지만 바로 제지당하고 만다. 마코토가 대꾸를 하려던 말은 유우 군에게 스크래치 하나라도 나는 걸 못 참는다는 말이었으니, 이즈미가 자신의 상처를 마코토에게 맡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즈미에게 마코토는 항상 자신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보호받을 대상이 아니니까. 둘은 아가페적 성향이 있으나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즈미는 오직 마코토에게만, 마코토는 모두에게. 그리고 이즈미의 사랑은 일방적인 형태만 갖춰도 온전할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마코토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마코토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남을 돕고, 거기에서 보람을 찾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아버린 꼴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코토의 불안함은 기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아직 지혈하지 못한 이즈미의 손을 잡은 마코토는 흐르는 피 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짓누른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마코토의 심리는 뭘까? 피는 변질되지 않는다. 현대의학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온전히 그 사람만의 것. 그것을 섞는다는 행위엔 많은 것이 담길 수 있다. 옛날부터 맹세의 의미로 새끼손가락을 베어내 그 피를 섞는다거나 혈서를 쓴다거나 하는 것들이 존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마코토는 그렇게 서로가 섞일 수 있기를 원한 것이다. 미적지근하고 로맨틱하게 시작한, 서로에게 미숙한 둘이.

 

이렇게 이즈미와 마코토의 감정이 세밀하게 이어지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후문 고양이가 죽은 것이다.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슬퍼하는 와중 마코토는 지금까지의 전개 중 가장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양이의 죽음에서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서 그대로 자신조차 희미해질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로 찾아간 이즈미에게서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마코토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이 장면에 잠시 이어지는 어린 이즈미와 마코토의 행복한 모습은 어쩌면 둘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다소 가슴 아픈 상상을 하게 한다.

 

서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싹 마른 드라이플라워에 성냥불을 붙이기 직전. 입을 맞추며 옥상에서 떨어진 둘의 표정은 어땠을까. ,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암흑이 이어진다. 곧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경악, 혹은 두려움. 와중에 누군가 움직이는 것 같다는 목소리가 시선을 끈다. 독자들은 여기서 불안한 궁금증을 느낀다. 과연 누가 살았을까?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이즈미다. 이즈미에게 흔적을 남기고 싶던 마코토의 바람은 성공적이었고, 이즈미는 마코토에게 말한 것처럼 목숨을 내걸었으나 죽지 못했다.

 

사는 기쁨. 분명 감정이라는 것은 정의내릴 수 없다지만 기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둘의 사랑의 결말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서로의 전부를 내걸 수 있던 비극적인 끝이 기쁨이었는지도 모른다. 메리배드엔딩. 둘만이 해피엔딩이고 지켜보는 모두가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결말. 이즈미와 마코토, 그 둘의 끝도 그랬을까? 그렇다 하기엔 마지막에 눈을 뜨고 있는 이즈미는 당시의 표정도, 예상되는 앞으로의 삶도 행복과는 지극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마코토와 이즈미의 드라이플라워는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오직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