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의 시초는 아주 미약하다. 그 미약한 우연 중에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는 것이 몇 있는데, 성민에게 그 우연은 꽤 빨리, 지독하게 찾아온 편이었다. 그날은 그 해에서 가장 무더운 날이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웬만큼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항상 붐비던 놀이터 조차 텅 비어있었다. 그건 많은 아이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성민이 놀이터로 걸음을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 덥다지만 놀이터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는 나무 밑의 그늘은 한적하게 쉬기에 퍽 좋은 장소였다. 놀이터에 들어서자 햇볕에 바싹 마른 모래가 성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늘 밑에 다다랐을 때 즈음 잠시 해가 자리를 피했고 시야의 전체로 누군가의 그림자 안에 들어온 듯 그늘이 졌다. 낯선 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머리 위로 들리는 소리에 성민이 고개를 들자 지금껏 본 적 없던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눈에도 짙은 이목구비와 짜증스레 구긴 표정이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어차피 작은 동네라서 딱히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또래놈들의 얼굴은 다 외우기 마련이었는데, 소년은 단 한 번이라도 보기는 커녕 스친 적도 없는 얼굴로 심기가 잔뜩 거슬린 것을 표내고 있었다.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보자마자 시비를 거는 낯선 소년에게 맞서 화를 내거나 상대하기 싫어 몸을 돌렸을 반면에, 성민은 소년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험할 텐데. 고작 자신이 앉아있는 나무 아래로 들어온 것을 이유로 짜증을 내는 소년에게 성민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내려와. 거기 위험해."




당연히 손이 닿을 리 없는 위치였음에도 손을 뻗는 성민을 보며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가 차다는 문장을 그대로 실현하면 그런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성민은 아랑곳 않고 손을 뻗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나 말투는 뒤로 했다. 걸터앉은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굳이 다른 이유는 없었다.




"미쳤냐? 내가 네 말을 왜 들어?"


"빨리. 나도 팔 아프거든."




미친놈 아니야? 중얼이는 소년의 표정은 이제 화보다는 황당함을 담고 있었고 성민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무에서 내려온 소년이 성민을 마주했다. 성민이 내밀었던 손은 당연스레 내쳐졌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 여린 손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뭔데 나 아는 척 하냐?"




그렇게 묻는 소년은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태도였다. 물론 경계는 아직까지도 잔뜩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성민은 잠시 얼얼한 손등 위를 쓸어내다 앞에 선 눈동자를 마주했다. 보통 아이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성민은 소년의 눈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젠 높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지 않은데도. 시선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갔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푸른 멍. 목이며 팔뚝에 나있는 멍자국을 어쩐지 쉽사리 넘길 수가 없었다. 분명 뇌리에 남아있는 경험-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 성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 누구한테 맞았어?"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움찔한 반응은 분명했다. 순간 경직된 얼굴은 곧이어 자연스럽지 못한 실소를 자아냈다.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비웃는 목소리에도 성민은 웃지 않았다. 소년은 웃고 있었으나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어오른 손등이 저를 내리친 손을 망설임 없이 쥐었다. 간극이 좁혀졌다. 




"누가 때렸어?"




실소가 떠올랐던 얼굴은 그 말에 이내 서서히 굳었다. 잠시간 성민이 쥐었던 소년의 손은 곧바로 성민의 멱살을 쥐었다. 다시 구겨진 소년의 표정은, 으레 아이들은 그에 겁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성민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소년은 직감적으로 느낀, 자신에 전혀 겁을 먹지 않는 성민이 거슬렸는지 잡은 옷깃을 거세게 한 번 끌어당긴 후 내치듯 손을 풀었다.  




"또 아는 척하면 죽는다." 






그 후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가버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성민은 한참 눈에 담았다. 한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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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波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