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이란 것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행복과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은 사람도 묘하게 들뜨게 하고, 어쩐지 행복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힘. 어찌 보면 위압감과도 비슷한 그 기분을 동철은 좋다, 싫다로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전에 일하던 나이트클럽과는 크기부터 다른 곳에서 동철은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두일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준 곳이었다. 클럽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듯 보지도 못할 정도로 눈코 뜰새 없이 일하면서도 동철은 핸드폰 액정에 뜨는 시간을 체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소라면 언제 퇴근하든 상관없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두일이 집에 들어올 시간을 얼추 맞춰 케이크를 사서 집에 도착하는 게 오늘 동철의 목표였다. 교회라곤 아주 어릴 적 할머니 손을 잡고 가서는 두어 번 어른들 예배시간에 끼어 앉아 있던 것이 다인데, 그런 주제에 크리스마스를 챙긴다는 게 조금은 우스운 것 같기도 했지만. 평소 사람이 빠지는 아침 시간까지 남아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 덕에 오늘 일찍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동철의 말에 안 된다며 가로막는 이는 없었다. 클럽 건물의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기가 어린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겨울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익숙한 누군가의 코트에 배어있는 냄새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곧 가장 가까운 프랜차이즈 제과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문을 닫을 시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거리는 분주했고 제과점의 불도 환히 밝혀져 있었다. 딸랑, 문 위에 매달린 작은 금색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밝은 주홍빛 불빛 아래서 동철은 케이크가 진열되어져 있는 곳 앞에 서서는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얼 사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케이크를 사본 적이 있었어야지. 어릴 때부터 생일이라고 먹은 것도 짜장면이 고작이었는데 이렇게 많은 것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자 키가 작은 종업원이 다가와 생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케이크 찾으세요?"
"아, 그... 딱히 찾는 건 없는데예. 제일 많이 사가는 게 뭡니꺼."
"제일 많이 나가는 거요? 이 생크림 케이크가 제일 잘 나가긴 하는데. 순우유크림이라 많이 달지도 않고요."
"그렇십니꺼. 그럼 그걸로 주이소."
"네, 이걸로 포장해드릴게요. 삼만 사천 오백 원입니다. 초 필요하세요?"
"초... 세 개만."
"네, 초 세 개 같이 넣어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끝까지 밝게 인사하는 종업원을 뒤로 한 채 다시 거리로 나온 동철은 손에 들린 케이크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큰 것 같지도 않은데 가격은 오늘 번 돈에 맞먹는 게 퍽 묘한 기분을 들게 했으나 오늘만큼은 어떻든 상관없다 생각했다. 박스 위쪽의 투명한 부분으로 언뜻 비치는 알록달록한 과일과 장식이 오늘만큼은 동철도 무채색이 아닌 남들과 같은 색으로 채색된 날을 보낼 수 있으리라 말해주는 것 같아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신호등의 불이 바뀌었고,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동철도 걸음을 옮겼다. 평소보다 조금, 아주 조금 들뜬 걸음이었다.
**
불이 꺼진 집안은 동철에게 익숙했다. 어두운 주황색 센서 등이 켜지고, 그 아래서 신발을 대강 벗어둔 동철이 집안으로 몸을 들였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거실의 불을 켜고 작은 식탁 위에 케이크 박스를 올려놓았다. 약간 바삐 걸었음에도 케이크 위의 장식들은 흐트러짐 없이 본래의 자리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익숙한 집안의 모습에 몸에 자연스레 서려있던 긴장이 탁 소리를 내며 풀리는 듯했다. 아직까지도 마음 놓고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은 동철에게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물끄러미 케이크를 바라보던 동철은 그대로 시선을 옮겨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어느새 자정이 넘어 있었다. 한 시쯤이면 올까. 와서 이걸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어떤 반응일까. 아직도 애처럼 케이크 같은 거나 사 온다고 하려나. 어쩌면,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동철은 하염없이 두일을 기다렸다. 핸드폰을 켜봤자 할 것도 없고, 티비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특집 방송이나 이런 날에도 어김없이 사건사고를 전하는 뉴스뿐이었다. 그저 식탁 위를 손가락을 세워 톡톡 두드리거나, 초침이 째깍대며 돌아가는 것을 보며 두일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늦는 걸 보면 분명 꽤 골치 아픈 일이 생겼을 거라 예상이 되었다. 오늘도 바삐 일한 탓인지 점차 눈꺼풀이 감겼다 뜨이는 속도가 느려졌고, 시야는 몽롱하니 흐려졌다. 기다려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
"아가."
꿈결에 들리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윽고 손목을 살짝 쓸어내는 온기에 동철은 눈을 떠 위를 올려 보았다. 두일이었다. 사실 목소리부터 헷갈릴 수 없이 그였다. 두일의 뒤로 보이는 시계가 약속한 시각이 한참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와 손길에 서운함은 하릴없이 풀려버렸다.
"와 이리 늦었십니꺼. 다친 데는 없고예."
"걱정도 많다. 그런데... 느 이거 사 온다고 일찍 들어오라 캤나."
케이크를 보며 빙긋 웃는 두일의 얼굴에 동철은 괜스레 민망해져 두어 번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해댔다. 아니, 그게 아이고. 받은 깁니더. 뭐, 연말이라 선물로... 동철 스스로도 믿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구구절절 해대며 민망함을 달래고 있던 찰나 두일이 손을 뻗어 동철이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느 덕에 분위기 좀 내보겠네. 묵자, 꼭 지 닮아가 이삔 걸로 사와가."
"다 큰 놈이 이쁘긴 뭐가 이쁩니꺼."
"스읍. 이쁘다믄 이쁜 기다."
박스에서 케이크를 꺼낸 두일이 찬장 쪽으로 걸어가 접시와 포크를 챙겨 다시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제 앞에 놓인 접시와 포크를 빤히 보던 동철이 고개를 들어 두일에게 물었다.
"아재 건 왜 없십니꺼."
"내는 이런 거 묵으믄 탈 난다."
거짓말인지 아닌 건지, 빙긋이 웃는 표정을 유지한 두일의 얼굴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 동철은 두일이 잘라 담아준 케이크 한 조각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두일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안 먹고 뭐 하냐는 듯 바라보고 있는 그 표정이 기껏 일찍 나와 케이크까지 사서 지금까지 기다린 동철의 마음은 하나도 모르는 듯해 새삼 얄밉기 그지없었다. 일 때문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동철의 손가락에 하얀 생크림이 묻었고, 그것은 곧장 두일의 뺨으로 향했다. 살짝 올라간 두일의 눈썹이 이 상황에 대한 의아함을 말하는 듯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포크로 앞에 놓인 케이크를 잘라 입에 넣은 동철이 낮은 소리로 읊조렸다.
"방금 복수한 깁니더."
동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린애들 보다 유치한 복수였지만 오늘의 상황에 골이 안 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엔 억울했고. 일부러 눈을 피하는 동철을 잠시 바라보던 두일이 푸스스 웃었다.
"나가 잘못혔다."
몸을 일으켜 동철이 앉은 쪽으로 걸어온 두일이 허리를 숙여 동철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마디마다 굳은살이 배긴 손이 턱을 감싸 쥘 때면 그 손의 온기 때문에 그저 평안한 기분이 들곤 했다. 두일의 체온은 동철에게 무언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달다, 아가."
가늘게 뜬 눈의 눈꼬리가 휘어질 때, 그 눈을 마주하며 동철은 죽어도 이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여즉 정확한 나이도 알지 못해 얼추 서른대겠지 하고 챙겨온 초 세 개 정도의 사이를 넘지 못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