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장마의 시작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얇은 이파리로 떨어질 때마다 가는 녹색 줄기가 꺾일 듯 고개를 숙였다. 하늘은 언제 햇빛이 떠있었냐는 것처럼 흐렸고 구름이 먹먹히 끼어 있었다. 잭과 엘이 함께 있는 방 안에도 빗소리가 가득 찼다. 붕대는 천으로 된 면직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날씨의 영향을 많이도 탔다. 그래서 잭은 요새 부쩍 붕대를 자주 바꿔 감았다. 찝찝할 만도 할 것이라고 엘은 생각했다. 


"잭, 붕대 가는 거 도와줄까?"

"너 붕대 감아본 적은 있냐."

"당연하지, 나 수준급으로 잘할 수 있다구?"


기세등등하게 엘은 잭의 붕대를 다시 감아나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좋은 솜씨였는지, 잭은 엘이 붕대를 다시 감아 나가는 모양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엘의 손이 멈칫 멈췄다. 잭의 배에 있는 큰 상처 때문이었다. 스스로 찌른 상처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어 그저 엘의 미간만 약간 좁혀질 뿐이었다.


"잭, 괜찮아?"


엘의 손이 상처를 매만질 때도 잭은 담담했다.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몸 좀 소중히 해. 너무 큰 상처잖아."

"괜찮아.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잭, 우리 약속했잖아? 설마 잊은 건 아니지."

"잊었겠냐."


순간 정적 아닌 정적이 일었다. 방 안에는 빗소리만이 만연했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엘 또한 이 순간만큼은 밝은 적색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또렷하고, 더 또렷하게. 둘의 약속은 한낱 자잘한 대화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결속 같은, 사슬처럼 단단한 약속이었다.


"좋아, 잭. 네 마지막 숨은 내가 거둬갈 거야. 누구에게도 안 뺏겨. 심지어, 너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야, 엘. 네 마지막은 내 거야."


그제야 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붕대를 다 감는 동안에도 창밖으론 요란하게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날씨가 둘에게 꼭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바야흐로, 장마였다. 

by 波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