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각, 하난이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몇 잔이고 그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추국이 그 찻잔에 두었던 시선을 올려 하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몇 번을 보아도 말간 얼굴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을 꼽으라면, 그 말간 얼굴에 짙게 드리운 수심이겠지. 추국은 하난을 따라서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달빛이 비쳐 은은히 반짝이는 연못이 이 밤의 풍류를 한층 달갑게 했다. 물론, 둘의 은근한 침체된 마음까지는 치유될 수 없었지만. 먼저 운을 뗀 것은 추국이었다.
"왜, 차가 입에 안 맞아? 넌 술을 못하니 일부러 특별히 공물로 바쳐진 걸 준비하라 일렀는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추국의 말에 하난이 빙긋 웃었다. 추국은 춘매가 죽은 이후로 하난의 웃는 얼굴이 꼭 우는 것과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고운 눈매, 그 안에 든 짙은 청색이 섞인 보랏빛 눈동자에 어린 물기가 지워지는 날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하루도 없었다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작은 다과 하나를 입에 무는 하난을 보며 추국은 다시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오늘따라 달이 밝다, 추국아."
하난의 목소리에 추국은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뜬 둥근 달이 밝기도 밝았다. 사실 추국의 눈길은 달보다도 달을 보고 옅게 미소 짓는 하난의 입꼬리에 가있었지만. 가만 보던 추국은 손을 뻗어 하난의 입가를 한번 쓸어내었고 하난은 민망한 듯 웃었다.
"입에 묻은 다과 가루도 모를 만큼 달이 예뻤어?"
짓궂은 추국의 물음에 하난은 부러 입을 꾹 다물고는 눈매를 휘었다. 그 모습에 추국의 마음에는 달빛이 일렁이는 연못마냥 하늘대는 바람이 일었다. 평소 올라간 눈꼬리가 유하게 휘는 순간, 때맞춰 눈에 들어오는 입술이 얼마나 예쁘던지. 괜스레 이런 마음을 들킬까 두려워 추국은 조금 전 채운 잔의 술을 단번에 비워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하난에게서 시선을 떼기란 어려웠지만.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하난의 맺음새 또렷한 둥근 눈동자가 아래로 데록 굴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하난과 이 세상에 동시에 눈을 떠서 그 후의 시간을 내내 같이 보낸 추국이 그를 알아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곧 그 예상이 엇나가지 않았다는 듯 하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국아."
"응."
"저 연못도 곧 마를지도 몰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폐하께서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게 또 반년이 넘어가잖아."
"바보야, 이 연못은 백매가 특히 아낀다고 폐하께서 물을 마르게 하지 않으시잖아. 걱정도 많다, 너는."
"…… 그런가."
입이 썼다. 하난이 말하는 바가 그런 뜻이 아님을 알면서도 추국은 일부러 모르는 체를 했다. 하난도 추국이 일부러 모르는 체를 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말끝으로 지어내는 하난의 쓴웃음에 추국의 속 또한 문드러지는 듯했다. 본래 인간이 아닌 둘이 타고난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춘매의 부활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너무도 기약 없는 기다림이기도 했다. 춘매가 돌아온다면 폐하의 옆자리는 다시 춘매로 바뀔 것이고, 폐하 또한 춘매가 죽기 전 온화한 성정을 되찾으실 거라는 희망만으로 버텨내는 시간은 길어져만 갔다. 추국은 문득 지금 추국의 앞에 앉아있는 하난의 머리칼이 본래 색보다 어두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꽃은 시들어갈 때 색으로 그 수명의 끝을 알린다 했던가. 그것에 덜컥 겁이 난 추국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하난이 추국의 손끝을 가리켰다.
"반딧불이는 험한 사람 곁에는 오지 않는다던데, 네가 좋은가 봐."
농이 섞인 하난의 말에 순간 완전히 사로잡혔던 불안과 긴장에서 벗어난 추국이 낮게 웃었다. 약지 끝에 앉은 작은 반딧불이는 아주 작은 등불마냥 반짝거리다 포르르 날아 추국과 하난의 사이에서 몇 바퀴를 돌고서 더 어둠이 짙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자리를 퍽 아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하난의 모습에, 추국은 멈칫했다가 곧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선을 그렸다. 추국의 손가락이 지난 자리를 따라 파아란 색깔의 나비들이 연이어 태어나 반짝이는 날개를 가볍게 팔랑였다.
"나비는 고운 사람한테만 간다더라."
결계로 만들어진 것을 알면서도 그 반짝임이 마냥 좋아 제게 날아온 나비떼를 구경하던 하난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추국은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빙긋 웃었다. 결계는 결국 진짜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둘은 이 고요에 머무르고 싶었다. 불가능함을 알기에 꿈꿔볼 수 있는 것이었다. 밤바람은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조금 전 날아왔던 반딧불이처럼. 옅은 바람에 흩날려온 꽃잎이 추국의 시선에 들어왔다. 춘매. 그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둘이 벗어나지 못하는 천명, 그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추국은 손을 뻗어 주운 연분홍빛 꽃잎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추국은 아직도 매화 꽃가지로 돌아간 춘매를 제 손으로 들었던 감각을 잊지 못하였다. 만약 춘매가 아닌 하난이었다면. 추국은 꽃잎을 쥐지 않은 손을 꽉 쥐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하난이 그 불상사를 겪게 되었더라면 추국은 분명 그 뒤를 따랐으리라고, 분명 그랬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하난이었다면…….
"추국아."
추국이 퍼뜩 고개를 들자 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하난의 얼굴이 있었다. 아무래도 제 표정이 너무 심각했던지 하난은 손을 뻗어 꽉 쥐고 있는 추국의 손을 펼쳐 손바닥 위를 조심스레 쓸었다.
"왜 그래? 살이 손톱에 다 패이겠다."
"아, 그게… 춘매 생각이 나서."
"아."
춘매라는 이름에 하난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수심이 어린 하난의 얼굴에 추국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꽃잎이 날아와서 그래. 표정 좀 펴라, 너 지금 엄청 못났어."
"자꾸 그럴래?"
푸스스 웃는 그 속이 멀쩡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추국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왜냐면 추국 또한 그랬으니까. 추국은 춘매가 죽은 이후 때로 하난이 웃는 얼굴이 더 아파 보였고, 또한 아팠다. 차라리 울기라도 했으면. 고운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 번이라도 닦아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추국의 한계는 신룡의 눈에 띄지 않게 그가 우는 모습을 가려주는 것 뿐이었으므로 추국은 매번 하난에게 일정선 이상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추국아, 여기 좀 봐."
하난에게 자신의 수심을 들키기 싫어 술잔을 바라보던 추국이 하난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추국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만든 나비가 반짝거려서 친구들을 데려왔나 봐."
정말로 조금 전 사라졌던 반딧불이가 친우들을 끌고 온 듯 하난과 추국의 사이를 밝게 비추며 날아다녔다. 밝은 청록빛 불빛과 푸른색 불빛이 어우러져 어둠을 밝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기에 추국은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번엔 반딧불이와 나비의 향연에 감탄하는 추국을 보던 하난이 추국 몰래 작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추국이 모르는 것이 있다면, 하난 또한 추국의 표정에서 속내를 얼추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추국이 기쁠 때면 하난도 기뻤고, 추국이 슬플 때면 하난도 슬펐으며 추국이 행복할 때는 하난도 함께 행복했다. 이 감정을 무어라 칭해야 할까. 하난은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시국이 지나고 나서, 둘이 진실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때 생각하여도 늦지 않을 일일 테니까.
"고운 사람만 찾아간다는 이 아이들이 길조였으면 좋겠다. 그렇지?"
"당연히 길조겠지. 고운 사람만 둘인데 안 찾아올 리도 없지만."
능청스러운 추국의 말에 하난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밤은 깊었고, 둘의 주위를 맴도는 불빛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밝은 달은 아직도 휘영청 떠있었다. 찬 밤바람마저 잠시 사그라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