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엔 여러 상징물이 있지만, 무엇보다 봄을 상징하는 걸 꼽으라면 단연 벚꽃의 개화였다. 오키나와에서의 개화를 시점으로 점차 꽃을 틔워나가는 연분홍빛 꽃망울과 흩날리는 꽃잎들은 딱히 어린아이가 아니라도 다 큰 고교생의 마음조차 다소 간지럽게 흔들어 놓기에도 충분했다. 예외 없이, 카라스노 고교에도 분홍빛 바람이 불어왔다.
"다들 고생했어!"
연습이 끝난 후 종막을 외치는 소리에 모두가 그제야 숨을 내쉬며 오늘 진짜 힘들었어, 저번보다 잘하던데? 같은 사소한 말들을 뱉어냈다. 시미즈는 익숙하게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 손마다 에너지 드링크를 쥐여주었고, 츠키네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여기저기 굴러가 있는 공을 주워 정리하던 와중 무언가 눈앞으로 툭 떨어지는 것에 고개를 들었다. 낡은 키링이 달린 열쇠. 다들 빠져나간 자리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다이치뿐이었으니 분명 주인은 다이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저, 사와무라."
"응?"
"방금 열쇠 떨어트린 것 같은데…. 맞아?"
그렇게까지 당황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덤벙댄 모습을 들킨 사람처럼 약간 당황한 듯한 다이치가 츠키네의 손에서 열쇠를 건네받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찰나 스친 손끝에 따뜻한 온기가 배어있었던가.
"같은 반 녀석 자전거 열쇠를 맡아준다는 걸 떨어트렸어. 항상 챙겨줘서 고마워, 츠… 시와스."
"아, 응.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다이치가 체육관을 나가고 뒷정리가 끝난 후에도 이상하게 츠키네의 머릿속에선 자꾸만 사와무라, 하는 부름에 뒤돌아보던 다이치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떠올랐다. 이름을 부르기 전 잠시 츠, 하는 발음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건 실수였을까. 아니면 츠키네의 이름이었을까. 손끝에 아직 그 잠시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해서 츠키네는 괜스레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약 이 온도를 측정한다면 37.5도의 온도가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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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곳곳에 만개한 벚꽃은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빈 에너지 드링크 박스를 버리러 가는 시미즈의 옆에 서서 걸어가던 중, 분리수거장에 도착했을 때 시미즈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벚꽃잎을 본 츠키네가 손을 뻗어 꽃잎을 떼어냈다.
"음? 뭐야, 츠키네."
"아, 꽃잎이 내려앉았어."
"내려앉았다는 표현 예쁘네. 나였으면 그냥 붙었다고 했을 거야. 벚꽃잎이라고 하니 전에 들은 말이 떠오르는데…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 히나타가 말했던 거니까 너무 믿지는 마."
"소원…. 예쁜 믿음이네, 그래도."
시미즈의 미소에 따라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츠키네가 흩날리는 벚꽃 잎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나 빨리 떨어지는데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는 거겠지. 혹시나 해서 뻗어본 손바닥에는 꽃잎이 내려앉기는커녕 스치지도 않아서, 츠키네는 활짝 폈던 손바닥을 무르고 남은 박스를 마저 정리했다. 유난히 건물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파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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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는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주홍빛, 노란빛이 섞인 후 밑으로는 어렴풋이 푸른빛이 비쳐 올라온다. 밤이 오는 것을 알리는 듯한 색채에 하굣길의 츠키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자전거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사와무라….'
오늘 주워서 건네준 열쇠가 생각나 츠키네는 뒤를 돌아보았다. 친구의 열쇠를 맡아준 거라 했으니 당연히 다이치가 아닐 테고, 아니었음에도. 바로 그때 가로수로 심어져있던 벚꽃 나무로 바람이 불어왔다. 벚꽃비가 내렸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 라던 시미즈의 말이 떠올라 펼친 손바닥 위로 옅은 분홍빛을 띤 벚꽃잎 하나가 살풋 내려앉았다. 소원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츠키네를 뒤돌아보던 다이치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원스레 올라가는 입꼬리. 항상 등에 자리한 번호 1번. 성실하고 온화하면서 동시에 어른스러운 말투와 태도. 안정감 있는 리시브. 벚꽃잎을 흩날리는 바람처럼 무언가 불어와 츠키네의 마음을 흩날리게 했다. 손톱달이 떠올랐다.
'나, 사와무라를 좋아하는구나.'
기어이 봄이 되지 못할 겨울이라면, 눈밭 위로 벚나무가 꽃을 틔우면 될 노릇이었다. 하얀 눈밭 위로 분홍빛 벚꽃잎이 떨어져 주변을 그의 색으로 물들였다. 바야흐로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