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상식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회귀하며 살아남는 유중혁의 상식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싶지만, 지금 유중혁의 눈앞에 있는 김독자는 충분히 그럴 만한 모습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이지, 김독자?"
독자를 바라보는 중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혁의 눈앞에 있는 독자는 평소의 김독자가 아니었다. 성격 따위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이상한 장식품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눈대중으로 160 정도의 키, 그리고 마른 몸의 여자가 중혁의 앞에 서있었다. 얼굴은 좀 더 선이 가늘어지긴 했지만 누가 봐도 김독자였고. 성난 얼굴의 중혁을 본 독자가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중혁아, 이게 말이야……. 히든피스를 찾아서 클리어 하긴 했는데……."
쭈뼛거리며 말하는 독자의 얼굴을 중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 보았지만, 이 상황이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김독자였다. 그저 원래 하던 대로 히든피스를 클리어한 후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 창이 떠서 수락한 것이 독자가 한 일의 전부였기에. 시나리오를 수락하자 생전 처음 느껴보는 느낌과 함께 몸이 평소보다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닿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은 [왕◼◼의 ◼◼]이었다. 그러니까, 도무지 독자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조건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체 이 상황을 중혁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일뿐이었다. 다른 대책도 없었고 스스로도 충분히 당황스러웠기에 중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린 게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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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숙소로 돌아온 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저 철옹성을 이해시킨 게 용하다 스스로 칭찬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독자는 순간 숨을 멈췄다. 중혁이 놀란 것도 당연지사였다. 거울을 볼 일이 없으니 어떤 모습인지 대략적으로만 짐작하고 있었는데,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여성의 몸 선과 신체였다. 허리까지 오는 검고 긴 생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혹시나, 혹시나 하며 만져본 가슴 또한 평소와 달랐다. 크기가 작아서 만지는 느낌도 별로 없긴 했지만. 시나리오가 아주 매몰차진 않은지, 몸이 변할 때 속옷까지 여성용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검정색 브래지어의 어깨 끈을 잠시 당겼다 놓은 독자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별일이 다 있다지만 정말 별일이 다 있구나. 그때였다. 중혁이 독자의 방으로 들어온 것은.
"중혁아!"
풀어진 셔츠에 위아래로 검은 속옷만 입고 있는 독자를 본 중혁의 미간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여자의 몸이 된 김독자를 이렇게 눈앞에서, 그것도 헐벗은 모습을 보는 것은 중혁에게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김독자."
"응?"
"넌 지금 스스로 여성이 되었다는 자각이 없는 건가."
"아, 몸이 여자가 되긴 했지. 그래도 나는 난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독자는 중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무언가 알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여자가 되니까 어색해서 그래? 속옷만 입고 있…."
"그만."
독자를 제지시킨 중혁은 한숨을 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이후에 이어지는 김독자의 행동 또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서슴없는 스킨쉽에 아무 데나 벗어던져놓은 옷가지 하며. 속옷만 입고 편히 돌아다니는 행동까지도.
"중혁아, 내가 이렇게 하면 어때?"
"……!"
갑작스레 독자가 팔짱을 끼자 평소라면 닿을 일 없던 촉감에 화들짝 놀란 중혁은 독자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뿌리친 팔이 너무 얇고 가녀려서 두 번째로 놀랐다. 여자의 몸은 원래 이렇게나 약한가. 팔이 얼얼하다며 투덜대는 독자에게 어색하게 사과한 중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쉬었다. 평소의 김독자라면 몰라도, 여자로 변해버린 김독자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영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유중혁의 파란만장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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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혁아, 나 머리 좀 묶어줘."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건 김독자 본인이었다. 변해버린 자신을 본 중혁의 표정에 평소와는 달리 당황한 표정이 스쳐가는 걸 보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평소와는 달리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가 찰랑거리는 게 불편해 직접 머리를 묶으려던 독자는 그제야 자신이 한 번도, 남의 머리조차 묶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긴 머리를 겨우 묶어봤자 머리끈 밖으로 빠져나오기 일쑤라 독자는 결국 중혁을 불렀다. 물론, 중혁을 놀리려는 의도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다분했을지도.
"…또 무슨 수작이지, 김독자."
"수작이라니? 그냥 머리 좀 묶어달라고. 너무 길어서 혼자 묶기 어렵단 말이야."
겨우 웃음을 참는 독자의 입꼬리를 눈치챘는지 못 챘는지, 잠자코 독자의 머리를 묶어준 중혁은 독자를 번쩍 들어 담요 위에 얹어 놓듯 내려놓았다.
"여기에 가만히 있어라.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무슨 일? 남자로 돌아가는 일?"
"그렇다면 바랄 게 없겠군."
독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중혁은 아주 많이, 어쩌면 태어난 이래로 가장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 전 독자를 안아 올렸을 땐 이게 새털인지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머리를 묶어줄 땐 왠지 모르게 나는 좋은 향에 독자 몰래 입을 꾹 다물기도 했다. 이 여자는 김독자다, 김독자다 하며 자기 최면을 걸었으나 안타깝게도 중혁은 여자가 된 독자에게 평소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독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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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혁아~."
"…또 무슨 일이지."
독자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옆에 있던 중혁은 도리어 본인이 피곤해지고 있었다. 기가 빨린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명 속은 김독자인데 겉은 김독자가 아니니… 아닌가? 딱 봐도 피로해 보이는 중혁을 보던 독자가 싱글대며 웃었다.
"잠깐 눈 감아봐."
"무슨 짓을 하려고."
"아, 빨리."
독자의 채근에 못 이겨 눈을 감은 중혁은 곧 뺨에서 나는 짧은 마찰음에 놀라 눈을 떴다.
"뽀뽀해주려고."
"김독자, 너란 녀석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은 채 중혁은 독자의 부드러운 뺨을 감싸 쥐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놀란 독자가 중혁의 이름을 부르려 입술을 달싹였을 때, 그 음절은 차마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둘의 입술이 겹쳐지고, 말캉한 입술 사이로 혀가 얽혔다. 독자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중혁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 동안 중혁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 분명 평소에 했던 입맞춤인데도 지금의 것은 무언가 달랐다. 더 떨리고, 더 두근거렸다. 맞대었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을 때. 곧, 독자의 몸에서 신비한 빛이 나더니 곧 판타지 효과처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흰색 연기가 흩어졌다. 아무리 중혁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더 놀랄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김독자의 모습이 지금껏 봐온 평소의 김독자로 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키스를 받은 공주님. 둘의 사랑의 힘으로 무시무시한 마녀의 저주가 풀렸습니다! 둘의 뜨거운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며-]
시나리오 클리어 창을 본 독자는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 보았고, 이어서 자신의 머리칼을 만져본 뒤 성별이 본래대로 돌아온 것을 알아챘다. 그리곤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중혁을 와락 끌어안은 뒤 목덜미에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뺨을 부비며 가볍게 웃었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하루의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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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that Story
"중혁아~."
"무슨 일인가."
"나 저번에 히든 시나리오 때문에 여자로 변했을 때 말이야, 좋았어?"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군."
"너 그때 당황한 표정 엄청 귀여웠는데."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다."
"나 또 그렇게 되면 어떡할 거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하여튼 재미없게 군다니까. 나 히든피스 찾으러 다녀올게!"
"아니, 아니다. 오늘은 내가 갈 테니 넌 가만히 있어."
"뭐야, 역시 불안한 거지?"
"……."
"쪽, 잘 다녀와. 사랑해."
"…얌전히 있도록 해."
그 시나리오 사건 이후, 독자에 대한 중혁의 보호가 심해진 건 독자에 대한 태도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에 더해진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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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