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타오르는 불씨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부패한 영주의 손짓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은 더한 노동, 혹은 기근을 겪어야만 했다. 그들에 시달리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고통 어린 신음만 울리던 마을에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대장간의 셋째 아들, A의 탄생이었다. 붉고 짧은 머리칼을 가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장하며 마을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텃세라도 부리듯 자라나는 A를 억눌렀기 때문이었다. 성장기의 억눌림은 그를 더한 문제아의 길로 이끌었다. A는 그가 칠 수 있는 사고라면 다 치고 다녔다 말해도 모자랄 만큼 마을을 멋대로 누볐다. 밭을 뛰어다니며 농사를 망치고, 고삐를 풀어 가축을 날뛰게 만들고, 대장간 일엔 손도 대지 않거나 대강 일을 하는 척만 하다가 밖으로 새나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일생에 한순간의 변환점이란 찾아온다고 했던가. A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온갖 사고를 치기 전이었다. 잠시 들판에 들른 A의 눈에 제비꽃 같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짧지만 색이 예쁜 머리칼을 가진 그 소녀는, 왠지 모르게 순하고 여리게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생이라곤 하나도 안 해봤을 게 눈에 훤하군.'


그렇게 생각한 A가 입꼬리를 한 쪽만 올려선 조소했다. A가 소녀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야, 거기."

"… 날 부르는 거야?"

"여기 너 말고 사람이 또 있어? 팔자 좋네, 남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들판에서 한가롭게 하늘 감상이나 하고 말이야."

"아주 잠시 쉬러 나온 것뿐이야. 이것도 몰래 나온 거라서… 들키면 크게 혼이 날걸."

"뭐야. 너 어디 집 애이길래 그래?"

"난 저 아래, 소작농 집 딸이야."


소녀가 가리키는 손가락에 다다르면, 마을에서도 가난하기로 유명한 소작농 집이 눈에 들어왔다. 결코 저런 집 아이로 보이진 않았는데.


'뭐, 내 알 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한 A는 걸음을 돌렸다. 정말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소녀가 눈에 띄었던 것도 그저 제비꽃 색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니까. 분명 그뿐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그 소작농 집에 눈길이 갔다. 마치 그날의 제비꽃에 이끌리듯이.


**


"B! 그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죄송해요, 어머니."


A가 그 소녀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은 아니었다. 매번 그 소녀가 사는 집을 일부러 지나치고, 나무에 걸터앉아 바라보곤 했으니까. 제비꽃 머리색을 가진 그 아이에게 B라는 이름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중요치 않았다. 소녀는 볼 때마다 많은 형제들에 치여 밥을 굶고, 허드렛일만 하곤 했다. 밥도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중노동을 하면 절대 긍정적인 생각이라곤 할 수 없을 텐데. A 자신이라면 농땡이라도 피웠으리라. 그러나 소녀는 달랐다. 부모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열심이었고,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일을 다 해냈다. 그리고 옅은 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A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여러 의미로 어리기만 한 A의 첫사랑이었다.


**


소년의 첫사랑은 서툴렀다. 대놓고 B를 도울 자신은 없던 A는 틈날 때마다 몰래 B의 일을 도와주었다. 물론 B가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안녕."

"… 뭐야, 나한테 인사한 거야?"

"응, 항상 도와줘서 고마워. 넌 이름이 뭐야? 난 B라고 해."

"… 큼, 난 A야. 그리고 딱히,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거든."

"그래? 어쨌든 고마워. 덕분에 오늘도 수월하게 일을 끝낼 수 있었어."

"그렇다면 다행이네. B…, 이름. 너한테 잘 어울려."

"고마워, A."


짧은 대화로 운을 튼 둘은 그 후로 늘 함께 했다. 마을이 원체 작았기에, A가 어울려 놀 만한 아이는 B밖에 없기도 했고.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된 B는 멀리서 바라보던 것보다 더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자신을 위한 이득은 하나도 취할 줄 모르는. 게다가 남을 상처 줄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못하는 B를 보며 A는 자신이 B를 지켜주겠다 결심했다. 본인 말고는 마음 약한 B를 지켜줄 사람 또한 없다고 생각했기에. 둘은 자주 마을의 들판을 노닐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들꽃이 가득한 작별의 길을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B를 만나기 전까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곳이었다.


'이런 마을에도 볼 만한 것은 하나 있었구나. 전부 네 덕분이야, B.'


그렇게 생각한 A는 조심스레 옆에서 걷고 있는 B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고, B는 수줍은 듯 고개를 약간 숙였다. 보잘것없다고만 생각한 마을의 들꽃이 가득한 길은 둘만의 특별한 장소였다. 마주 잡은 두 손은 영영 풀리지 않고 꼭 그렇게 행복할 것만 같았다. 산들바람에 흰 들꽃들이 천천히 흔들리며 둘의 뒤를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


비극은 꼭 희극의 바로 뒤에 따라붙는다. 이번 농사는 대흉년이라 했다. 그것이 A의 마을만을 피해 갈 리 없었다. 적당한 나잇대의 아이들을 꽤 값을 주고 사간다는 노예상이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돌았으나, 평소보다 좀 더 과한 장난으로 B를 울리고 다퉈버린 A의 귀까지 그 소식이 닿을 리는 만무했다. 그 사이 B는 헛간에 숨어 있었으나 곧 부모에게 목덜미를 잡혀 노예상의 손에 넘겨졌다. 꽤나 수려한 미모와 적당한 나이를 가진 B가 선택되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A……!"


B는 마지막으로 애타게 A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것은 닿을 수 없는 거리의 소리였다. 그래서 B가 노예상에게 팔려갔다는 걸 A가 알게 된 것은, B와 다른 팔린 아이들을 실은 마차가 다른 마을로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A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발을 내딛었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마차를 끄는 말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멀어져 가는 마차를 쫓다가 발을 헛디뎌 진흙탕에 뒹구르게 된 A는 B의 이름을 불렀다. 애처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마차는 멀어져 갔고, A는 모든 희망을 놓아버린 듯 몸에 온통 진흙을 묻힌 채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B! 내가, 내가 반드시 구하러 갈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타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A는 외쳤다. 마차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A는 B가 타있을 그 마차를 눈에 오롯이 담아두었다. 언젠가 꼭, 널 찾으러 갈게. 그 마음만을 되새기며 A는 이를 갈았다. 복수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중략*




Chapter 5. 붉은 계약


이렇게 달라져버린 B일지라도, 분명 B의 과거는 존재했다. 옛날, 비참하게 노예시장에 끌려갔을 때부터 B는 계속 A를 기다렸다. A가 자신을 찾으러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아예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역시나 구원은 없었다. B는 변태적인 취향의 귀족에게 팔려 온갖 학대를 받으며 매일같이 두들겨 맞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어리고 예쁜 소녀에게 폭력을 가하는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귀족은 B를 완전히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매일같이 맞아서 성한 구석이 없어진 몸과 얼굴로 결국 B는 노예시장으로 다시 끌려나갔다. 그렇게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도중에도 매일같이 마음속으로 A를 찾았지만, A는 볼 수 없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노예시장에서 B의 끔찍한 몰골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구기며 경멸을 숨기지 않고 지나갔다. 다 죽어가는 시체가 되어가는 와중에서야 B는 완전히 A를 포기했다. 그는 더 이상 B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생전 보지도 못한 미모의 귀족이 B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과 하얀 피부, 비단결 같은 옷. 마치 천사와 같은 자태였으나 갈라진 목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꼴인데, 왜 천사 같은 모습을 한 그가 자신을 그렇게 주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사와 같은 그의 눈에 흥미가 돈 것은 그때였다. 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넌 바라는 것이 무어냐."


갈라진 목으로, 가까스로 목소리를 낸 B가 대답했다.


"…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여주세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예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고 그 장소는 피바다가 되어 전멸했다. 천사와 같은 그는 쓰러져 있던 B를 품에 안고서 자신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먹였다. 흡혈귀의 계약이었다. 계약을 받은 자는 명령대로 행동하는 인형이 되고, 인간적인 감정은 모조리 사라지게 만드는 계약. 하지만 B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끔찍한 흡혈귀가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구원자였기 때문에. B의 구원자는 그 흡혈귀였다. B가 A와 재회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는 B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저 흡혈귀, B의 주인을 위해 쓰일 체스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계약에 의한 감정의 소실이었으나 B는 이에 저항할 생각조차 딱히 없었다. A가 B의 구원자였던 시절은 이미 너무도 과거의 일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늦어버린.



Chapter 6. 닳아버린 추억


둘이 함께 지내게 된 이후, A는 옛날 B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어릴 적 노닐던 들판과 아주 비슷한 아름다운 들판, 푸른 바다, 그리고 유명한 첨탑까지. 가릴 곳 없이 B를 데리고 다니며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주고 시장터에서 예쁜 장신구를 사주어도 B의 표정엔 한치의 변화도 없었다. 어쩌면 A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B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A는 B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절규하고 오열했다.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는 차가운 표정, 그게 B가 A에게 보이는 전부였다.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려 했으나 그조차 제압당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이제 그만두시죠. 그래도 아무 소용 없습니다."

"B, 너는…! 정말 아무 기억도 없는 거야? 우리의 추억은… 다 허상이었냐고!"


B는 무표정으로 그에게 일관했다. A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닥을 긁으며, 눈물을 흘리며 과거 B의 수줍은 미소를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Ending. 피로 물든 꽃길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드디어 흡혈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이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믿기 어렵게도, 순식간에 국왕은 살해당했고 근위병들 또한 전멸의 위기였다. 마을 사람들도 전부 피난을 가는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마을에 무언가를 사러 나왔던 A와 B는 그 과정에서 떨어지게 되었고 A는 평소 애용하던 대검을 꺼내 흡혈귀에 맞섰으나 너무도 차이가 심해 밀리기만 할 뿐이었다. 가까스로 견디는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리고, A는 곧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얼굴이며 몸에 잔뜩 피가 튄 채로 B는 무표정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죽여나가듯 B는 아이와 여자, 노인을 가리지 않고 전부 칼로 찔러 살해하고 쓰레기 던지듯 시체를 치웠다.


"지원을 부탁합니다. 저 혼자로서는 부족합니다."


피를 뒤집어쓴 B는 너무나도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B의 주인은 흡혈귀였다. 인간을 싫어하는 흡혈귀.


'언젠가는 널 구출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


A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되돌리기엔 모든 것이 너무 늦어 있었다. B는 그런 A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마을 저편까지 도망가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


그렇게 상황이 대충 마무리된 뒤, 나타난 것은 B의 주인. H였다.


"내 짐작보다 더욱 훌륭히 마무리해주었구나. 앞으로도 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아무리 머흔 곳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 따라오거라."


B는 고개 숙여 H에게 인사했다.


"하찮은 저를 구원해주신 주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광경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A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힘없는 걸음으로 B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문득, A는 B와 걸어가는 길이 예전에 걸어가던 마을 길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희고 붉은, 보랏빛 들꽃이 가득 피어있던 그 길. 하지만 옆에 널려있는 것은 들꽃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명과 시체들이었고 주변은 남은 불씨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B와 함께하는 길이 지옥 길이라고 말하듯이.


"언젠가는 당신께도 주인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겁니다."


담담히 계약에 대해 말하는 B를 바라보며 A는 절망에 빠진 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와서 널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부질없는 생각의 편린이었다.





by 波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