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하게 안개가 낀 골목길 어딘가, 웬만큼 이곳에 통달한 자가 아닌 이상은 찾기 어려울 크기의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은커녕 방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인 크기의 공간에 사내 너덧 명이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렇게 맨손으로 거리만 걸어서 뭘 할 수 있다는 건데? 지금까지 했던 시위에서 뭔가 달라진 거라도 있어? 달라지긴 커녕 시선만 안 좋아졌을 뿐이야! 예전보다 더 악화된 상황이라고."


"그래서, 무기를 들자고? 정부의 병력과 전투 무기를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그랬다가는 혁명이고 뭐고 다 같이 개죽음이야. 지금까지 해왔던 시위까지 다 허사라고!"


목소리가 높아지고 급기야 멱살을 잡을 기세가 되자, 말없이 앉아있던 성민이 손을 휘저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둘 중 무어라 이어 말하려던 남자는 성민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보고서 짧은 욕을 중얼이곤 자리에 앉았다.


"맞아, 지금까지의 시위가 무용지물이었던 건 사실이야. 그래서, 무기를 들자? 아까 했던 말처럼 개죽음이 될 게 뻔해. 알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는지."


성민의 마지막 말에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실상 지금까지 이뤄낸 것보다는 피해가 더 컸다. 정부를 이루고 있는 세력은 모두가 우성과 열성을 가리지 않은 알파였고 그중에서 마저도 열성 알파들은 하급 간부를 맡는 것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투표권을 가진 베타들의 언성으로 필수적으로 일정 수의 베타를 관직에 고용해야 하는 정책이 실행되었으나 오메가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한숨이 짙게 이어졌다. 시위를 한다고 무언가 크게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 악화가 될 것이라고도 예상치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몇 차례 거리에서 맨손으로 평화 시위를 벌인 결과 알파들의 적나라한 경멸이 어린 시선에 이어 베타들까지 그런 시선을 보내왔던 것이다. 오메가들이 들고일어나자 베타들의 등용을 늘리고 복지 정책을 강화한 것이 정부의 한 수였다. 이이제이. 오랑캐로 오랑캐를 퇴치한다. 그 속담과 같이 기세등등 해진 베타들은 오메가들에게 손조차 대기 꺼려하는 알파들과 달리 직접적으로 경멸을 표했다. 식당에서 오메가라는 이유로 내쫓기는 것은 기본이었고, 어린아이들마저 베타인 아이들에게 맞고 오기 일쑤였다. 성민은 얇은 아랫 입술을 꾹 짓씹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오메가가 아닌 베타인 성민이 이 혁명단체에 들어오기까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계급화가 뿌리내린 사회에서 각 층의 대립은 심화되어 있었고, 베타인 성민이 오메가로 이루어진 혁명 단체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는 의심하는 눈길이 대다수였다. 몇 차례의 시위와 협상을 거쳐서야 그들은 성민을 받아들였고, 베타의 사회를 잘 알고 있는 덕에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장 격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타조차 오메가에게 척을 진 상황에서 성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민의 어두워진 표정을 본 남자 중 한 명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자,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더 진척될 사항도 없는 것 같고. 다들 지쳐 보여."


미간을 구긴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성민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라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다들 수고했어. 오늘은 이만 해산하자."


성민의 말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 나가던 사내 중 한 명이 여즉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성민을 돌아보았으나 성민은 모두가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집으로 돌아온 성민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분명 이 혁명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건만. 이젠 모두 소용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성민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갈 때 미처 끄지 못한 티비의 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최준용 국방부 장관의 아들 최우혁. 당연스레 타고난 우성 알파라는 이 사회의 지위와 아버지의 권위, 그리고 수려한 외모와 이 시대의 엘리트라는 칭호까지. 자신과 너무도 다른 모습에 성민은 픽 웃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썩어있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리고 성민이 우혁을 만난 것도 그 때였다. 아직 알파와 베타, 오메가를 계급으로 치지 않던 시기. 성민은 새삼스레 우혁을 처음으로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어디 하나 뚜렷하지 않은 곳이 없는 얼굴 선, 여느 애들보다는 신경질적이던 말투, 그러면서도 분명, 악의는 담기지 않은 짙은 암갈색 눈동자. 기억 속 우혁의 얼굴은 지금 티비에 나오는 우혁의 모습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아직도 그 말투는 여전할까. 성민의 깜빡이던 눈이 스르르 감기고 티비 위에 걸려있는 시곗바늘이 째깍이는 소리가 티비 소리에 섞였다. 화면 속 우혁은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 옆에서 인형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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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한도일까 아니면 한계일까.


사람을 죽이는 일도 별거 아닌 일이 될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박정구와 이효민은 자주 싸웠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일상을 공유했다. 그들의 일상에 폭발이라거나 어두운 적색과 녹색이 칠해진 전선이 뒤엉켜있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주 많이 평범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옛날 옛적에 무산된 지 오래였다. 이효민은 방에 담배연기가 가득 들어차 있으면 짜증을 냈다. 그런 날이면 딱 봐도 싸구려 티를 내는 글자가 박힌 라이터가 죄 물에 젖어 못쓰게 되어 있었다. 틱틱거리는 소리만 날뿐 작은 불씨 하나 내지 못하게 된 라이터를 손에 들고 인상을 구긴 박정구의 시선이 꽂힐 무렵이면 이효민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태연스럽게 대답했다. 거, 환기 좀 시키라니까. 요즘 담뱃값도 존나 올랐던데. 


형, 배고픈데 우리 라면 먹을래? 


이효민은 우리라는 말을 자연스레 썼다. 박정구는 그 이질적인 단어를 읊조렸다. 우리, 우리. 이효민과 박정구가 같이 있으면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건가. 언제부터? 이렇게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면 그 생각은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마냥 이효민을 처음 만났을 때까지 가닿곤 했다. 이효민과 박정구가 만나게 된 이유는 뭘까.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건가. 처음 만나게 된 그 순간부터 찾을 수 없던 답이 지금에 와서야 유레카를 외칠 수 있을 만큼 뚜렷한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박정구는 마른 얼굴을 쓸어올렸다. 옆에서 잠들어 있는 이효민을 볼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새끼를 죽이면 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점화, 폭발. 이 둘의 연관성은 명확하다. 박정구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중간에 끼인 기폭제가 이효민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효민은 폭발의 근원지가 박정구인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폭발의 근원지가 박정구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박정구는 이효민이 무서웠다. 이효민이 그렇게 싫다고 입에 달고 사는 꼰대 마냥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때가 있었다. 말이 연설이지 멱살 잡고 소리치는 것에 불과했다. 박정구는 분명 화를 냈다. 그런데 이효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형, 내가 무서워?  




박정구는 숨이 턱 막힌다는 말의 뜻을 그제야 체감했다. 폐에서부터 복부까지 싸하게 피가 식었다. 이효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 속이 다 보인다는 듯이. 박정구는 그런 이효민이 무서웠다.






그래서 박정구는 이효민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






오늘도 뉴스에서는 살인사건을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박정구는 옷을 갈아입고 맥주 한 캔을 땄다. 너는 뭐 저런 걸 보고 있냐, 툭 뱉듯 던진 말에 이효민은 그게 무슨 재미있는 말이라도 된다는 양 웃었다. 왜, 재밌잖어. 이효민의 그런 실없는 말은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박정구는 문득 집이 평소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뭐지. 그러고서야 집안 공기가 여즉 매캐하다는 걸 알았다. 




너 웬일로 환기 안 시켰냐.


형이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지랄, 불이나 꺼. 자게.   




맥주캔은 비었고 티비도 꺼졌다. 불 한 점 들지 않는 깜깜한 방에서 둘이 누워있을 때면 가끔 박정구는 이효민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박정구는 옆에 누워있는 이효민의 숨소리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받았는지도 몰랐다.




형.


... 왜, 잔다면서.


형은 여전히 존나 시시하다. 






박정구는 감았던 눈을 뜨고 황급히 불을 켰다. 당연히도 이효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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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추억이란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드물게 어떤 경우를 제외하고는. 






*






물통에 붉은색의 물감이 풀리고 그것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성민은 몇 번이고 그날의 꿈을 꾸었다. 추억이라고 할 만한 거리도 없는, 흔히 그저 어린 날의 스쳐간 만남이라 치부될 그 시간을 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는 미지수였다. 잠에서 덜 깬 호흡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사납게 생긴 눈매, 그 안에 맺음새가 뚜렷했던 눈동자. 그러면서도 마냥 날을 세우지는 않았던 표정. 소년이 성민에게 남겼던 잔재는 그러했다. 그리고, 최우혁 이라는 이름. 그 세 글자. 할머니 때문에 잠시 머무르는 거라 말했던 소년은 성민에게 어떠한 말도 없이 홀연히 동네에서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잠시 오르내리다 사라진 구설수를 토대로 하자면 원래 그 집 가족들은 이런 촌 동네에서 살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감은 있었다. 성민은 우혁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꼈으니까. 첫눈에 보아도 우혁은 빛이 드는 곳에 있을 사람이었다. 평범함과는 멀리 있는, 그러니까, 성민과는 먼 곳에.




이미 소년이라 불리는 나이를 한참 지나버린 성민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마른 세수를 했다. 흘긋 돌린 시선 속에 들어온 회색 교복을 죽어도 입기 싫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맘때의 애들은 누구보다 가십거리에 민감하니까. 중학교를 다니는 3년동안 맞고 짓밟혔던 성민의 과거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물에 푹 젖은 것 같은 걸음은 어떻게든 옮겨졌다. 설령 성민이 걸어나가는 끝이 소실점이라 해도 성민은 걸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던 어린아이일 때부터 성민의 등에 지워진 것은 너무도 많았으므로. 






*






공부를 깨나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였음에도 그들의 흔한 서열은 존재했고 성민은 이번에도 그 안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거울을 볼 때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기 없는 자신의 눈동자였다. 제게 닿는 싸늘한 무시나 선연한 멸시 속에서 버텨낸다는 일은 그에 익숙해지는 만큼 썩어들어가는 일이었다. 마치 이미 곪아버린 사과처럼. 닳고 깎여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얀 손목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잠시 흐려졌던가. 뜬금없게도, 그 아이가 생각났다. 제 손을 쳐내고도 자신이 더 상처받은 얼굴을 하던 소년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폭력이었다. 뺨을 맞아서 터진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무엇을 향한 악의를 제게 이렇게 풀고 있는 놈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은 진작에 포기했다.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욕지기를 뱉어낼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또다시 발길질이 날아들 게 뻔해서 꾸역꾸역 속을 눌렀다. 핏물을 삼키고, 무수한 모멸감도 삼켰다. 저항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바라지도 않았다. 믿지 않는 것을 바랄 수는 없으니까.




아, 이러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제 주위를 둘러쌌던 놈들의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새끼 마냥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맞았음에도 귓가를 파고드는 이름이 들렸다. 최우혁. 최우혁, 이라고.




"야."




날카로운 눈매. 뚜렷한 암갈색 눈동자.




"이성민, 너 왜 이딴 놈들한테 맞고 있냐."






너의 눈을 볼 때면 구원이라는 것을 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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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식당에 있는 티비에는 항상 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성민이 만화 영화를 볼라 치면 어머니께 들었던 손님들이 티비를 보셔서 안 된다는 그 말에 언젠가부터 성민은 리모콘이 티비 바로 옆에 놓여있어도 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딱히 재미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몸집보다 큰 의자에 앉아 다리를 데롱거리며 뉴스를 보고 있으면 세상엔 항상 나쁜 일만 가득한 것 같았다. 누군가 죽고, 다치고, 불이 나고, 무언갈 훔치고.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염없이 슬프거나 지독히 화가 나있거나 했다. 후자에서, 성민은 언뜻 비친 그의 아버지의 얼굴을 애써 무시했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 손님들이 먹고 간 음식이 담겼던 그릇을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씻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팔 아래로 보이는 푸른 멍은 아버지의 얼굴처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성민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도박꾼이었다. 어머니가 식당을 해서 번 돈을 도박으로 날려먹고 와서는 화풀이로 어머니를 때리는 게 다반사였고 성민은 지금보다도 어릴 적부터 그것을 고스란히 보고 자랐다. 성민이 놀이터에서 만난 소년을 무시할 수 없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워낙 높은 곳에 앉아있던 이유도 있었다만은, 몸 곳곳에 나있는 멍자국이 심상치 않아서. 그저 넘어져서 난 상처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누구에게 맞았냐는 물음에 순간 주춤했던 몸과 표정은 결코 대수롭잖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던 성민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나이 답잖게 생각만 많다고,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때로 듣는 것은 괜한 말은 아니었다. 곧 사건사고에서 기상예보로 넘어간 뉴스 화면에서는 한동안 무더위가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어쩐지 창밖으로 먹구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눅눅한 냄새가 났다.






*






사실 다시 만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지금 마주하고 있는 소년의 얼굴은 여전히 많은 것이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저번엔 나무 위더니 이번엔 담벼락이라니. 왜 이렇게 높고 위험한 곳이라면 다 올라가 앉아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거기 위험..."


"야. 너 나 따라다니냐?"




성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은 여전하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성민은 전처럼 손을 뻗었다.




"그런 적 없어. 내려오기나 해."


"지랄. 너 내가 또 아는 척 하면 죽는다고 했지?"


"그러게 왜 자꾸 그런 데만 올라가고 난리야. 내려와."


"아, 진짜 또라이 새끼..."




투덜거리면서도 전이랑은 달리 순순히 내려오는 모습에 성민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픽 올라갔다. 여전히 제 손은 잡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번엔 쳐내지는 않았으니. 제 쪽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옆을 따라 걸으며 어떤 말은 하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나, 그러다 제 쪽을 흘긋 보는 소년의 곁눈질에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묻냐?"


"그냥. 난 이성민인데. 너 이 동네 안 살지, 여기 좁아서 얼굴 다 알거든."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여기 왜 왔어?"


"... 아, 진짜 귀찮게 구네. 할머니 때문에."




할머니는 왜, 라고 성민이 입을 떼려던 순간 손등 위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오기 전 언뜻 본 하늘이 유독 흐리다 싶어서 가지고 나온 우산이 한 쪽 손에 들려 있기는 했다. 다만 하나라는 게 문제였고. 소나기인지 삽시간에 굵어지는 빗방울에 소년 또한 당황스러운 듯 싶었다. 




"너 이거 쓰고 가."




그렇게 성민이 뱉은 말과 불쑥 내민 우산에 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된 것 같기는 했지만. 당황보다는,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라고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이미 들린 것 같았다.




"너 집 여기서 머냐?"




예상의 범주에 없었던 말에 성민은 잠시 멍하니 소년을 보다 퍼뜩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별로 멀리 나온 것도 아니고, 뛰면 얼마 안 될 거리였으니까.




"그럼 같이 쓰고 가. 아, 너 씌워다 주고 나 쓰고 가면 될 거 아니야."




뭘 그렇게 얼빠진 표정으로 서있냐며 툴툴거리는 소년을 보던 성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 같이 쓰고 가자. 나중에 돌려줘. 그렇게 작은 우산 하나를 둘이 쓰고서 얼마쯤 걸었나, 곧 도착한 식당 앞에서 성민이 소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 야."


"어?"


"최우혁."




"최우혁 이라고, 내 이름." 






빗소리 속 제 이름을 알려주고 뒤돌아가는 소년의 어깨 한 쪽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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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시초는 아주 미약하다. 그 미약한 우연 중에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는 것이 몇 있는데, 성민에게 그 우연은 꽤 빨리, 지독하게 찾아온 편이었다. 그날은 그 해에서 가장 무더운 날이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웬만큼 뛰어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따라서 항상 붐비던 놀이터 조차 텅 비어있었다. 그건 많은 아이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성민이 놀이터로 걸음을 옮긴 이유이기도 했다. 덥다지만 놀이터 가장자리에 심어져 있는 나무 밑의 그늘은 한적하게 쉬기에 퍽 좋은 장소였다. 놀이터에 들어서자 햇볕에 바싹 마른 모래가 성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늘 밑에 다다랐을 때 즈음 잠시 해가 자리를 피했고 시야의 전체로 누군가의 그림자 안에 들어온 듯 그늘이 졌다. 낯선 소리가 들렸다.




"너 뭐야?"




머리 위로 들리는 소리에 성민이 고개를 들자 지금껏 본 적 없던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눈에도 짙은 이목구비와 짜증스레 구긴 표정이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어차피 작은 동네라서 딱히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또래놈들의 얼굴은 다 외우기 마련이었는데, 소년은 단 한 번이라도 보기는 커녕 스친 적도 없는 얼굴로 심기가 잔뜩 거슬린 것을 표내고 있었다. 웬만한 아이들이라면 보자마자 시비를 거는 낯선 소년에게 맞서 화를 내거나 상대하기 싫어 몸을 돌렸을 반면에, 성민은 소년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위험할 텐데. 고작 자신이 앉아있는 나무 아래로 들어온 것을 이유로 짜증을 내는 소년에게 성민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내려와. 거기 위험해."




당연히 손이 닿을 리 없는 위치였음에도 손을 뻗는 성민을 보며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가 차다는 문장을 그대로 실현하면 그런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성민은 아랑곳 않고 손을 뻗었다. 잔뜩 날이 선 목소리나 말투는 뒤로 했다. 걸터앉은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굳이 다른 이유는 없었다.




"미쳤냐? 내가 네 말을 왜 들어?"


"빨리. 나도 팔 아프거든."




미친놈 아니야? 중얼이는 소년의 표정은 이제 화보다는 황당함을 담고 있었고 성민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나무에서 내려온 소년이 성민을 마주했다. 성민이 내밀었던 손은 당연스레 내쳐졌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아직 여린 손등이 붉게 달아올랐다.




"뭔데 나 아는 척 하냐?"




그렇게 묻는 소년은 조금 전보다는 누그러진 태도였다. 물론 경계는 아직까지도 잔뜩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성민은 잠시 얼얼한 손등 위를 쓸어내다 앞에 선 눈동자를 마주했다. 보통 아이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성민은 소년의 눈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젠 높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지 않은데도. 시선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갔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푸른 멍. 목이며 팔뚝에 나있는 멍자국을 어쩐지 쉽사리 넘길 수가 없었다. 분명 뇌리에 남아있는 경험-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 성민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너 누구한테 맞았어?"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움찔한 반응은 분명했다. 순간 경직된 얼굴은 곧이어 자연스럽지 못한 실소를 자아냈다.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비웃는 목소리에도 성민은 웃지 않았다. 소년은 웃고 있었으나 웃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어오른 손등이 저를 내리친 손을 망설임 없이 쥐었다. 간극이 좁혀졌다. 




"누가 때렸어?"




실소가 떠올랐던 얼굴은 그 말에 이내 서서히 굳었다. 잠시간 성민이 쥐었던 소년의 손은 곧바로 성민의 멱살을 쥐었다. 다시 구겨진 소년의 표정은, 으레 아이들은 그에 겁을 먹었을지 모르지만 성민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소년은 직감적으로 느낀, 자신에 전혀 겁을 먹지 않는 성민이 거슬렸는지 잡은 옷깃을 거세게 한 번 끌어당긴 후 내치듯 손을 풀었다.  




"또 아는 척하면 죽는다." 






그 후 그대로 뒤를 돌아 걸어가버리는 소년의 뒷모습을 성민은 한참 눈에 담았다. 한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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